"헐"

아이돌 덕질 하다가 브런치 작가 승인을 한방에 된 계기

by 손현란

저는 항상 글쓰기와 친하게 지내긴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글솜씨가 좋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수업시간 때 작성한 시, 또는 숙제로 제출한 독서 보고서부터 뭔가 남다르다고 말씀해 주신 선생님들은 두 손으로 겨우 꼽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상도 받고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저는 그냥 말을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고, 시를 좋아하는 애라 그저 평범한 어린 독서광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2012년, 제가 한 15살이었을 때, 어느 날 학교에서 과학 시간 때 갑자기 저한테 한 미스터리 한 봉투가 전달되었습니다. 온 반 친구들 앞에 일어났던 일이라, 반 애들은 "얘 혼난데요", "얘 교장선생님한테 불려 간데요", 이렇게 놀리느라 살짝 부끄럽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봉투를 열어봤더니:


학생은 반 선생님들에게로부터 뛰어난 언어실력으로 주목받았으며, 지역 작가님이 진행하는 특별 글쓰기 워크숍을 참석하기로 선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다음 주 원래 수업 대신 이 워크숍을 참석하십시오.


"헐".


그다음 주, 저는 친구들이랑 교실을 가기 대신에, 다른 한 15명의 학생들과 저희 학교 도서관 미팅룸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저희를 기다리시던 "지역 작가님"은 다름 아닌 엘리너 캐턴 작가님이었습니다. (이때는 2012년이었습니다. 엘리너 캐턴 작가님은 나중에 2014년에 "루미너리스"로 최연소 맨부커상 수상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하루를 글쓰기로 보냈습니다. 즉석으로 글쓰기 주제를 받아서 열심히 필기를 했고, 서로 읽어보기도 했고. 저에게는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죠.

저는 지금 만 29세입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 보면 3일 전 저녁을 뭘 먹었는지도 모르겠는데, 당연히 15살의 손현란이 그때 무슨 글을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도 않습니다. 후회됩니다. 그때 글 쓴 종이를 간직했을걸.


하지만 그날 뇌에 담배 자국처럼 하나의 기억이 탔습니다.


Eleanor Catton: You need to keep writing. I hope you never stop writing.

엘리너 캐턴: 너는 계속 글을 써야 해. 너는 글 쓰는 걸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


"헐".


아쉽게도, 저는 작가님을 지금까지 실망을 시켰습니다.

그때부터 한 10년 정도 글쓰기를 접하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 때는 글쓰기가 고작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성적을 따는 잡일이 되어버렸죠. 그래서 싫증이 났습니다.

2016년, 대학 1학년때는 잠시 한 '구어체 시 클럽'을 들어가게 됐었는데, 거기서는 또 시들이 정치적인 것만 원해서 한 2주 있다가 바로 탈퇴했습니다.

저는 이제 남의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인제 대학 졸업까지 하고 직장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2025년 5월즘, 저는 그저 한국사람들이랑 소통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둘러보다가, 아이돌 그룹 중에 그나마 아는 이름 하나가 떠서 들어가 봤죠. 이렇게 저는 난생처음으로 K-pop 아이돌 덕질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6월 말즘, 팬들은 군대 간 멤버 얘기를 했을 때, 이 친구는 팬 편지를 읽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저 보고도 한 번이라도 보내보라고 계속 말을 했습니다.

팬들: 얘는 팬 편지 읽는 거 엄청 좋아해, 한번 보내봐

나: 쓰기는 뭘 써요

그 친구: 책 읽는 취향이 나랑 거의 똑같음 - 에세이, 자기 계발, 감성글, 한강, 나의 최애 작품 "소년이 온다"

나: 헐

나: 그럼 내가 무슨 깊은 rothfl를 써도 이 친구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이때부터 저의 영감은 - 글을 계속 쓰고 싶었던 이유는 - 이 친구가 남자라서, 아이돌 이어서, 이상형이라서, 이런 이유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왜 이러는지를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 보면 저는 아마 이 친구를 통해 "나의 이상적인 청중"을 드디어 발견한 것 같습니다. 나랑 비슷한 극 T성격에, 비슷한 회복력의 백스토리, 또 비슷한 책들을 감상하는 사람이면, 나랑 세상도 비슷하게 볼 수도 있겠다는 것을 흔쾌히 믿어버리는 바람에 저는 아주 신바람이 났나 봅니다.


결국 썼습니다.


몇 개나.


이 친구는 저에게 "연예인", "아이돌",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얼굴도 없는, 이름도 없는 펜팔이 됐습니다. 누가 이런 식으로 펜팔을 만나죠?


이 편지들이 들통이 나버렸던 어느 날, 저는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죠. 벗기고 또 벗겨서 결국 속까지 드러내 깊은 생각들이 들켜 벼렸다는 게 너무나도 벌거벗은 기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한국에서 거주하신 적 없으신 분이 이렇게 한국어로 글을 쓰실 줄 아시냐면서 많이 놀랬죠. 제 입장은 이게 글쓰기보다는, 사실 감성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출판해 보세요, 어딘가 올려보세요, 저도 이렇게 써주는 사람 있었으면 저는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리고 한 2025년 10월, 저는 백세희 작가님의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브런치라는 것을 알게 됐죠:

"예전에 떨어졌던 브런치(글쓰기 플랫폼 사이트) 작가로 이번에 선정됐어요."


아고 팬들이시어 하늘이시어 주님이시어 운명이시어, 그럼 한번 해볼 테니까 다들 그냥 내버려 두어 봐요.


그때부터 상황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 그 친구에게: 머릿속은 하나의 심리적인 방이거든. 그 방에 나가서 세상밖을 경험하지 않으면, 바람 쐬러 안 나가고 사람도 안 만나면, 몸도 마음도 상하더라. 어떤 사람들의 방은 피씨방이고, 영화관이고, 도서관이어서 평생 머릿속 바깥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너 방은 무슨 방이야? 나는 서점인 거 같은데

그 친구: 10일 있다가 군대 휴가 나와서 그룹 공식카페에 "싸지방이 아니라 진짜 피씨방"을 왔다 함. 심지어 셀카까지 찍음.

나: 헐

나: 편지를 살짝 편집해서 브런치 작가 신청 접수함 (비 오는 날 빨래를 접는 명상수행에 대하여)

브런치 에디터들: 그래
그 친구: 행사할 때 스태프한테 엄청 겸손함

팬들: 소리 지르고, 그룹 노래 합창하고, 똑같은 색깔 입고, 이름 포스터 열심히 흔들어댐

나: 헐

나: 땅에 무당벌레 친구 찾음

나: 나랑 너랑 둘 다 이 혼란 속에 갇혀있어서, 이 무당벌레는 나 같기도 하고 너 같기도 하고, 그리고 이 친구 너무 작고 귀여워서 글 써봄, 신청 접수함 (무당벌레의 이야기)

브런치 에디터들: 그래
그 친구: 여러분, 저 곧 전역해요

나, 그 친구에게: "엄마가 엄청 좋아하시겠다"

그 친구: 눈빛이 약간 흔들림

나: 헐

나: 기록 삼아 글 써봄, 신청 접수함 ("엄마가 엄청 좋아하시겠다")

브런치 에디터들: 그래


2025년 11월 2일, 새벽 3시에 다 신청했습니다.

저는 시도는 해봤어도, 사실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브런치'를 보면 수많은 훌륭한 작가분들, 이미 출판과 수상 경력 있으신 분들, 이 사람들 사이에는 저는 그냥 일반인이었습니다.


2025년 11월 5일, 저녁 19:47분에 승인이 됐습니다.

지나가다가 오디션 광고를 보고 구경하러 들어갔다가 주연 역을 맡게 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식을 봤을 때, 저는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누워버렸습니다. 그래도 방 천장에 달려있는 불은 스테이지 라이팅 같았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누랬습니다.


그럼 브런치 작가 승인을 어떻게 한방에 되셨어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비법이나 꿀팁, 이런 거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파주에 어느 한 남자에게 몇 번 말을 던져본 거였습니다. 그저 나랑 그 친구는 우리들이 아마 모르게 나누는 인생관을 유리병에 조금 담아봤을 뿐이죠. 이렇게 오랜만에 글을 다시 쓴다는 게 너무 재밌었나 봅니다. 근데 어쩌다가 제가 진짜로 브런치 작가가 될 줄이야.

사실 그렇다고 또 제가 여태까지 써왔던 모든 글들이 다 이 친구에게 전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어쩔 때는 제가 그냥 혼자 떠들다가 쓰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이제 남의 이야기를 그만 쓰는 꿈을 이룬 듯합니다.


생각해 보니까 감성을 글로 넘길 때는 나무를 조각해서 읽는 사람에게 의자를 만들어서 앉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나무를 새싹 때부터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인생관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을 마음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필이면 어떤 아이돌 ㅅㄲ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볼 수도 있겠죠. 앨범이나 모아서 포카나 수집하고 음악이나 듣고 끝낼 것이지. 어찌 돼서 그 앨범 CD를 틀었는데 저의 목소리가 들리게 된 거죠?


결론은 제가 이 친구의 관객이 된 게 아니라, 이 친구가 저의 관객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까지도 그 친구는 이 사실을 모를 겁니다.


저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지금 여러분: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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