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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원 Aug 30. 2023

소설가를 믿지 마세요 4

나는 위험한 폭탄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위자료가 얼마든 주고 말자.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여자는 소설 주인공으로도 모자라고 경박해. 순간 그녀가 대문 앞에서 휙 돌아보았다. 

   “설마 나를 소설에 넣을 작정은 아니겠지? 만약 그러기만 해. 정말 죽여 버릴 거니까.”

   그녀는 정말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있었던 것과도 같은 살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말해. 쓰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그녀는 이렇게 많은 권한을 가졌는가. 아니, 어떻게 나는 이렇게 불륜이나 하는 처지가 되어 본처에게 이렇게 무례해도 좋은 권한을 주어버렸나, 하는 비참함이 몰려왔다. 

   “쓰지 않겠어. 당신은 내 소설에 들어올 인물이 못 돼. 그리고 쓴다고 해도 꼭 당신이라는 법도 없지. 소설은 허구니까 얼마든지 많은 인물이 창조되거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

   나의 말에 그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설에 대해서만은 함부로 나불대지 못해. 당신은 진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타성에 젖어 그저 되는대로, 보고 싶은 대로만 살았던 사람에 불과하니까. 또한 이런 일을 겪고도 천박한 세속의 행태를 그저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난 당신에게 없는 것이 있어.’ 나는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나는 최근에 읽었던 한 책 제목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당신 같은 본처는 낭만적 거짓에 휘둘리고 나 같은 상간녀는 그래도 소설적 진실이라는 것을 알아. 흘깃 그 세계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아도 말이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가짜 인생에서 당신이나 당신 부부는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까 나 보다 백 배 천 배는 멍청한 거지.’ 나는 마음속으로 악다구니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조금 전의 기세가 어디로 갔는지 그녀가 힘없이 대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의 걸음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대문 닫는 소리까지도 그녀에게 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기껏 그런 폭언과 모욕감에 문을 꽝 닫아버리는 광란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나라는 여자는 눈동자를 요란하게 움직이며 늘 긴장의 상태에 있는 참새 같은 부류가 아니라 부동의 눈동자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가 목표물이 방심할 때 낚아채는 최강의 독수리와도 같은 부류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위대한 거야. 그런데도 소설가를 믿어선 안 된다고 함부로 찧고 까부는 거야? 나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아직도 미적지근한 온기가 남아있는 그녀의 찻잔을 마당으로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찻잔이 사정없이 부서졌다. 

   아직도 10분이나 남았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 여자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변기 위에 앉아 있을 때 울음소리가 들렸다. 코를 푸는 소리도 요란하게 들렸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도 여전히 여자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여자가 세면대 쪽으로 다가선 나에게 대뜸 말을 걸었다. 

   “상간녀 소송한 거 맞지요? 조금 전에 앉아 계시던 거 봤어요. 나도 소송했거든요. 이 연놈들이 그래, 이미 동거를 하고 있었더라고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삼천만 원 위자료 소송했어요.” 

   여자의 얼굴을 보자 나는 여자가 조금 전 내 옆에서 한숨과 탄식을 번갈아 하다가 벌떡 일어서서 가버렸던 장본인임을 알아차렸다. 

   “얼마 청구했어요? 돈 때문에 시작한 게 아닌데 시간이 지나니까 돈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요. 돈으로 보상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근데 혹시 이혼은 했나요? 당연히 했겠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여자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화장실 안에서, 그것도 가정법원 안 화장실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쩌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내가 멍한 채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이해해요. 나도 세 번의 재판을 거치면서 그냥 미친 여자로 있었다니까요. 교통사고를 낸 것만 해도 몇 번이에요. 체중이 10킬로나 빠졌으니까. 참, 난 이혼했어요. 그런 남편이랑 어떻게 살아요? 근데 남편이 증인으로 나서려고 한 거 있지요? 판사가 그걸 막으니까 사실확인서를 낸 거고. 참내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기에 이렇게 씌어있는 겁니다. 우리 부부는 처음부터 파탄이었다, 부부사이가 좋지 않았고 특히 아내의 신경질과 불안, 통제, 감시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웃 간에 상당한 불화가 있고 친구도 없고 교통사고를 얼마나 많이 냈는지 그걸 조목조목 쓴 거예요. 그건 주차하다가 좀 긁은 거거든요. 정말 치사한 새끼. 물론 불면증이 있어서 수면제 처방을 받은 것은 있어요. 근데 그걸 내세워서 재산을 다 주어서라도 아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썼더라니깐요. 재산 해봤자 꼴랑 아파트 한 채가 다인데. 다행인 것은 우린 아이가 없어서 뭐. 아이가 있었다면 양육비니 해서 더 받아낼 수도 있는데.”

   난 손을 씻고 닦았다. 여자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힘내요. 남편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가장 멋진 복수를 하는 겁니다. 열심히 운동해서 멋진 몸을 보여줘야 해요. 고급차에 고급 아파트에 명품 바디가 되어 우연을 가장해서 나타나는 거지요.  그것들은 얼마나 구질구질하게 사는지. 원룸에 사는 것만 봐도 알잖아요?”      

   나는 여자에게 그만 나의 정체를 말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나와 여자는 화장실을 나와 법정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는 연신 핸드백을 만지작거렸고 한숨과 탄식을 번갈아 하였다. 이윽고 전광판이 진행으로 바뀌고 양복 입은 남자가 나와 말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비공개이니까 자신의 선고가 나오면 바로 나가는 겁니다. 녹음도 안됩니다.’ 

   여자가 내 귀에 속삭이며 말했다. 

   “우리 전화번호 교환해요. 이것도 다 인연이에요.”

   나는 여자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여자가 자신의 휴대전화로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눌렀고 나는 신호가 오자마자 끊었다. 여자가 싱긋 웃었다.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도 따라 들어왔고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 모두 그대로 들어왔다. 이윽고 판사가 들어오고 양복 입은 남자의 지시 하에 모두들 일어섰다가 앉았다. 나는 선고의 네 번째 순서였고 내 옆의 여자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여자의 판결이 부디 내 뒤에 있기만을 바랐다. 여자가 다시 내 귀에 속삭였다. 

   “여자 판사라서 우리에게 유리할 거예요. 나이도 좀 지긋해 보이니까 아무래도 산전수전 좀 겪었을 거 아니에요?” 

   유리하다는 말에 피식 웃었다. 이미 여자 간의 연대는 무너졌는데 무슨 망언이야.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농락한 것에 대해 겨우 상대 여자를 능지처참하려고 이렇게 소송까지 건 주제에 그런 말이 나올까? 남편과 이혼하든지 참든지 하면 되었지, 불화의 책임을 상간자에게 돈으로 보상받으려고 한 것이 얼마나 치사한 것인지 정말 몰라서 그래? 겨우 돈이야. 삼천 만원을 걸었으니 다 받는다 해도 겨우 삼천만 원이야. 상간녀의 잘못이 뭐 길래, 설사 유부남인 것을 알고 통정을 했다고 해도 그것을 상간녀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간통죄는 폐지되었고 이미 남녀 간의 애정행각은 사적 공간으로 넘어갔는데 결국 돈으로 자신의 감정을 보상받으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지. 또 다른 여자를 쳐서 겨우 돈으로 위로받는 것에 불과할 뿐. 

   내가 한 잘못은 오로지 남자의 거짓말을 믿은 것, 뭔가 이상한 예감을 애써 무시했다는 것뿐이다. 누군가의 전화가 걸려 오면 구태여 대문 밖까지 나가 전화를 받는 그를 보면서 이미 나는 그의 거짓을 예감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자 더 이상 소설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소설에 대한 생기를 철저히 거세시켰다. 나는 수없이 많은 본처와 첩, 상간자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제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들 정도의 병약하고 침울하고 신경질적인 그들 유령과도 같은 무리들 속에 창백한 얼굴로 나 또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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