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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Dec 27. 2020

복수할 테다

무급휴직 중인 회사는 잊기로 했다.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복직 가능성이 없었다. 시골의 이런 작은 공장은 원래 사람 쉽게 뽑고, 쉽게 자르는 곳인가 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구직활동을 다시 시작하니 45라는 숫자가 화살처럼 폐부를 쑤셨다. 나이는 결코 거꾸로 먹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45살이다. 나는 다시 여러 번 거부당했다.


45살이 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 했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작가에다 구직시장에서도 별 볼 일 없이 나이만 먹은 사람이었다. 단지 여기가 제주도여서 양질의 일자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해 봐야 소용없었다. 바쁘고 힘든 직장생활을 뒤로 하고 좀 편하고 여유롭게 살고자 제주로 왔던 것이, 오랜 꿈이었던 작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것이 혹독한 대가로 되돌아와 내 인생을 암흑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제주엔 왜 이리 양질의 일자리가 없는지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임금은 왜 이리 낮을까? 제주만 이럴까? 취업사이트에서 지역별로 검색을 해봤다. 일자리의 질이나 임금은 수도권을 벗어나면 모든 지역이 똑같았다. 일자리의 양극화도 결국 수도권 집중현상의 결과다. 이런 일자리뿐이라면 돈 들여서 대학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일자리는 대졸자를 우대한다.


도대체 전공이란 뭘까. 인터넷에 올라온 구인 글을 보면 자꾸만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구인 글을 보면, 생수포장일은 식품공학 전공자를 우대한다. 전자제품 조립은 전기, 전자공학 전공자를 우대한다. SNS 관리는 시각디자인을, 디지털마케팅은 언론, 광고, 홍보학 전공자를 우대한다. 그야말로 학력 인플레이션의 시대다. 멀지않은 훗날에는 건설현장에서 벽돌을 나르려 해도 건축학과를 졸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공이란 선풍기가 아닐까. 밀려드는 이력서 중에서 아무거나 몇 개 고르는 데 꼭 필요한 장비 말이다. 바람 앞에 이력서 뭉치를 휙 던져서 제일 멀리 날아간 거 몇 개 뽑아 들어서 서류합격자를 선발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전공이란 그런 게 아닐까. 단지 지원자가 너무 많으면 곤란하니까 OO전공 우대라는 문구를 써놓은 게 아닐까.


학력 인플레이션에 겹쳐 중장년이라는 나이의 장벽은 눈높이를 낮춘다고 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단순노무도 청년을 우대하고, 힘이 필요한 일도 청년을 우대하고, 배송 일도 청년을 우대하고, 사무직도 청년을 우대하고, 개발직도 청년을 우대한다.


취업시장에서 중장년층의 가장 큰 경쟁자는 청년층이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층은 경력 많은 중장년층을 경쟁상대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청년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유~ 이 늙은 사람들과 경쟁은 무슨~ 청년층 우대는 봤어도 중장년층 우대는 본 적이 없네요, 라고. 여러 구체적인 조건들이 있지만 어쨌든 취업시장에서 우대 받고 있으니 힘을 내세요, 라고. 그리고 이 말도 꼭 하고 싶다. 이 나라에선 45살이면 퇴물 취급이니 중간에 그만 둘 생각하지 말고 진득하게 직장에 붙어 있으세요, 라고.


45살이면 대부분 채용 부서의 팀장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다. 위계질서에서 나이가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나라에서 45살은 좀 그렇다. 그래서 이력서를 보낼 때마다 기도한다. 부디 팀장이 최소 46살이기를!


만약에 내가 성공해서 회사를 이끈다면 모든 직원을 중장년층으로 고용할 테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고용해서 나이 따위는 업무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위계질서 따위가 조직운영에 얼마나 쓸모없는 문화인지를 증명하고 싶다. 그게 지금 나를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복수다. 반드시 복수할 테다.


일단 취업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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