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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Sep 02. 2020

상처와 물집이 아물어 군살이 되었다

공장이라는 생소하고 어색한 환경에 적응하고 나니 직장생활이 주는 안정감에 빠져들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포근하고 안락한 기분인지 모른다. 얼어있던 심신에 눈을 뚫고 올라온 봄날의 새싹처럼 생기가 돌았다. 금요일을 기다리는 설렘은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보수 좋은 전문분야의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로 내려와 10년 동안 유유자적한 대가로 저임금 공장 노동자가 되었지만, 금요일 퇴근시각 만큼은 세상 모든 직장인과 같은 크기로 설렜다.


나는 이제 돈을 벌기 때문에 많은 것이 허용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금요일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캔맥주를 사는 것이었다. 무엇을 곁들여 먹을지 고민하며 수산물이나 축산물 코너를 기웃거리는 것, 이도저도 귀찮으면 치킨을 시켜먹을까 족발을 시켜먹을까 고민하는 것. 나는 회사에 다니므로 이 평범하고 쉬운 일상을 남들처럼 똑같이 누릴 수 있었다.


평범한 것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 안정의 가장 큰 선물이다. 불안은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외면하게 한다.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웃고 떠들 수 없다. 잠을 잘 수 없고, 영화 한편을 볼 수 있는 집중력을 앗아간다. 그리고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서서히 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을 펴자 고대문자처럼 흩어져 있던 검은색 글자들이 어떤 뜻과 의미를 가진 텍스트로 정렬되어 있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책 한권을 완독했다. 아직도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지만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감동적인 변화였다. 책을 읽는다는 건 나에게 평화로운 일상을 의미한다. 나는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소설을 쓰는 건 아직 멀었다. 지난 날, 글쓰기는 나를 가난으로, 해답 없는 고뇌의 늪으로, 무례함이 자욱한 공기로 몰아넣었다. 지난 날, 작가로서 스스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만 남들과는 다른 가혹한 기준을 적용했고, 아무리 애를 써도 거기에 닿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조급함이 있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작가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그 누구도 나와 나란히 걸어주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나만의 속도 없이 남들과 나란히 가기를 원했다.


나 같은 작가에겐 상처 주는 사람은 많아도 지지하는 동지는 적다. 나는 사람들이 공신력 있다고 믿는 지면을 통해서 글을 발표한 적이 없다. 이를 테면 신춘문예나 대형출판사의 공모전 당선 말이다. 나의 작품은 언제든 무시와 비아냥을 장착하고 바라보는 시선의 평가 대상이었다. 작품을 발표하는 건 발가벗겨져 광장에 서는 것이었다. 광장엔 찬사도 있지만 무시와 비아냥도 섞여 있었다.


굳이 발가벗고 광장에 서지 않더라도 나를 할퀴는 발톱은 곳곳에 숨어 있다. 특히 가까운 곳에서 날아든 발톱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내 작품은 감상이 아닌 평가의 대상이었다. 독자이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업계 종사자와 같은 눈으로 내 작품을 재단하고 평가했다.


중요한 건 상처입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날아와도, 무엇이 나를 할퀴어도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 “이까짓 거” 라며 무시해야 한다. 나는 나를 지켜내는 힘을 기르고 싶다. 더 단단해지고 싶다. 단단해진 후 다시 글을, 다시 소설을 쓰고 싶다.


지금은 근육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좋다. 땀 흘려 일하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나를 할퀴지 않는다. 용접을 하고, 쇠를 갈아내고, 기계부품을 조립하고, 전기배선을 하는 동안 빠지게 되는 무아지경의 세계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 마치 모든 걸 내가 장악하고 있는 기분이다. 희고 곱던 내 손 여기저기에 생긴 상처와 물집이 아물어 군살이 되었다. 지금은 겨우 손이지만 몸과 마음 모두에 군살이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팔뚝에도 근육이 생겼다. 몸과 마음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건 틀렸다. 둘은 하나다. 마음이 단단해지려면 몸부터 단단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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