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길고도 짧은 8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너’는 우연한 기회로 나에게 왔다. 지인의 지인이 자신과는 잘 맞지 않는다며 소개해줘 알게 된 '너'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너무나도 작디작았다. 그렇게 ‘너’와 나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가장 작은 방 한 칸 크기 정도의 원룸 방에 ‘너’와 내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너'가 울고, 뛰고, 뜯고, 물고, 아무 이유 없이 신이 나는 모습을 바라볼 때 너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너’를 내다 버릴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오고 나서야 내가 '너'의 그 시간을 이해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너'의 작고 소중했던 시간 동안 잘해주지 못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눈물이 난다.
그렇게 ‘너’와 내가 보낸 8년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좀 더 가족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의 나는 ‘너’와 보낼 날들이 보낸 날보다 훨씬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두 배, 아니 세 배는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너와의 마지막 순간에 '이 정도면 됐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길었으면 좋겠다.
‘너’는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는 오로지 한 공간에서 잠을 자거나 바닥을 뒹굴거나 장난을 치며 논다. 그곳을 오가는 나의 존재를 관찰하는 것도 너의 일과 중에 하나다. '너'가 나를 자주 바라본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잠을 자고 있지 않은 시간에 너의 시선은 항상 나에게 머무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너’의 삶이 행복한 것인지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집에 오면 나를 반겨주는 ‘너’를 보면서 기쁘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하다. '‘너’가 나를 너무 많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너'는 가끔씩 내게 와 안긴다. 안기지 않더라도 그저 옆을 지켜준다. 그러한 행동에 어떤 사명감이라도 있는 걸까? 항상 궁금하지만 답을 알지 못한다. '너'는 말이 없다. '너'가 만약 내 곁에 있지 않더라도 5분 안에 '너'가 내 곁으로 오게 하는 법을 알고 있다. '너'는 울면 내 곁으로 온다.
‘훌쩍’ 소리가 나면 ‘너’는 꼭 느릿한 걸음을 움직여 내 옆으로 다가온다. 내가 우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다. 어떠한 감정을 보여준다거나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다거나 하는 것 없이 그저 가까이 다가와 옆에 앉아 가만히 있는다.
따뜻하든 차갑든 푹신하든 딱딱하든 거의 항상 내가 울면 '너'는 내 옆에 앉아 있는다. 그런 모습이 조금 슬프고 따뜻하다. 다정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울면 강아지처럼 나의 눈물을 핥아준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너'는 미동 없이 조용한 몸을 움직여 내 곁으로 자리를 옮긴다. 더 가까이. 가끔은 그런 ‘너’가 너무 따뜻해서 ‘너’의 따뜻한 배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뱃살이 나의 얼굴을 감싸면 슬픔이 조금 가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눈에 흐르는 눈물은 슬픔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을 ‘너’는 알까? 원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거나 현재를 살지 못하고 정신없이 복잡하게 헤매는 생각에 생각을 반복하며 지내다가 덜컥 그것이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고 또 조금 괜찮아진다. 그것이 반복되고 복잡한 삶에 버겁게 매달려가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너'는 알아차린다. ‘너’의 머릿속에 나와 나의 슬픔은 어떤 의미일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울면 넌 꼭 옆에 있다. 그렇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