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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Aug 08. 2022

재생의 시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얻은 것


그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주일!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줘 이미 너에게 마음이 식어버려서 일주일 동안 네가 보고 싶어지면 다시 주말에 약속을 잡을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끝이야"


"알겠어"


"내 말 알아들었으면 지금 나가는 게 맞아"


"응.. 갈게"


나는 나가려다 말고 현관문 앞에 서서 외쳤다.

"안아줘"


그는 마지못해 현관 앞으로 걸어 나와 나를 안아주었다.


껍데기만 남은 그와의 짧은 포옹, 한 달 동안 불같이 사랑했던 우리의 연애는 이게 마지막일 거다.


"쾅!"

이윽고 문이 닫혔고 나는 밖에 홀로 남겨졌다.




화창한 토요일 정오, 잠시나마 정들었던 그의 동네를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가슴이 아파 어쩔 줄 모를 때는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걸어야 한다. 상념에 머무르지 않도록 눈앞에 풍경들이라도 계속 바뀌어야 한다.


눈앞이 흐리고 가슴은 누군가 주먹으로 있는 힘껏 내리친 것처럼 욱신거린다.

진짜 물리적으로 아픈 느낌이 든다.


이건 바이러스다.

심장 속에 기생하는 바이러스가 틀림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심증후군"

공식적인 이름으로는 "타코츠보 신드롬(Takotsubo syndrome, TTS)"이란다.


상실을 경험했을 때 심장의 모양이 문어를 잡는 항아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형된다고 붙여진 일본의 의학용어인데

정신적 충격에 의해 심근육이 갑자기 경직됐다가 이완되는 이 스트레스성 심근증은 뇌에서 외치는 절규가 골수에서 생성되는 혈액세포를 변이시켜 심장으로 그대로 흘러들어가고 심혈관까지 무리를 주는 진짜 병이었다.


올해 2월에 앓았던 코로나도 3일 동안 앓고 말았는데 이 문어항아리 심장병을 그날 이후로 열흘 넘게 앓았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

그의 집에서 나와 걷고 있는데 더 최악의 상황인 건 앞으로 몇 시간 뒤면 친구의 결혼식에 가야 한다는 거다.


이 상태로 누군가의 화양연화 속으로 들어가 웃으며 축하해 줄 자신이 없다.


결혼식 시작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서 반포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핸드폰을 들어 네이버 지도를 켠다. 어딘가로 가긴 가야 하는데 검색창에 뭘 쳐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문어항아리 심장과 세트로 뇌정지가 온 것 같다.


"저기요!"

그때 길거리 한복판에서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네?"

"아.. 지나가는 길에 너무 예쁘셔서.. 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눈물이 고여서 앞도 잘 안 보이는 와중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상황인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얼굴은 제대로 보기나 하고 묻는 건가? 이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전개 아닌가? 만약 누군가가 쓰는 시나리오대로 내가 살고 있는 거라면 그 작가는 보통 또라이가 아닐 거다.


그런데 작가의 똘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결국 결혼식 가는 걸 포기하고 친구에게 사과의 메세지와 축의금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남역에서 누군가 또 번호를 물어보는 게 아닌가?


백주대낮 길거리에서 한 시간 텀으로 두 번이나 번호를 물어보는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지만

상실의 패닉에 빠져있는 나에게 이딴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이쯤 되면 싸이코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목이 막혀 목소리도 안 나오는데 두 번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로 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저기 약국 앞에 서있다가 지나가시는 거 보고 마음에 들어서 왔어요 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니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정작 내가 원하는 사람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자꾸 엉뚱한 사람들을 보내주는 꼬일 대로 꼬인 쓰레기 시나리오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며칠 뒤,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하던 그에게 카톡이 왔다.

"짧은 기간이지만 고마웠어 다른 좋은 사람 만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는 결국 내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증발해버렸다.


"그래 짧았지만 나도 고마웠어 좋은 사람 만나 :)"

매정한 그를 원망할 시간에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기로 했다.


너무 결이 달랐던 우리였지만 그도 나도 각자 다른 언어로 최선을 다했으니 나는 그가 선택한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기로 했다.  


이젠 산산조각 나버린 그와의 추억 파편들을 하나하나 치울 일만 남았다.




매미 우는소리마저 날카로운 잔인한 여름,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숨 막히는 폭염 속에서 걷고 또 걸었다.


시원한 사무실에 몸을 편히 두면 심장은 수시로 문어 항아리 모양으로 변하는지 너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푹푹 찌는 땡볕 속에서 몸을 괴롭혀야 비교적 마음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었다.


폭염이 누그러진 저녁이 오면 술을 마셨다.

밥은 그렇게 안 넘어가는데 술은 술술 잘도 넘어간다 이 정도면 술배가 나올 만도 한데 체중은 무섭게 줄어든다.


난 아직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은데 그는 우리 관계라는 방에서 돌연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렇게 빈방에 홀로 남아 술잔을 기울이며 대답 없는 그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대화하고 또 대화했다.  


그렇게 술을 먹고 뻗어도 새벽 5시면 심장이 아파서 눈이 떠진다. 분명 나는 잠들어서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어제의 슬픈 뇌에서 보낸 혈액세포가 아침부터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다.




며칠 전,

초저녁부터 취해서 침대에 누워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저 그때 강남역에서 번호 물어보았던.. 저번에 전화드렸을 때 회식 중이라고 하셔서 끊었는데 지금은 통화 괜찮으신가요?"

"아....."


그날 두 번째로 번호를 물었던 남자였다.

며칠 내내 오는 카톡에 답장을 일절 안 했더니 회식 중에 전화가 왔었는데 급하게 끊고 잊고 있었다.


"연락이 잘 안 되셔서 전화드렸어요 언제 커피라도 한잔해요"  

"사실은 제가 심적으로 누굴 만날 상황이 안돼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저한테 번호 여쭤보셨던 날이 남자친구랑 헤어진 날이라.."

"아.. 어쩐지.. 눈시울 붉어져서 힘없이 걸어가시는 거 보았어요"


남자는 내 얼굴을 정확하게 본 게 맞았다.  


"혹시 운동 좋아하세요?"

"운동이요?"

"네~ 운동해 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저는 마음이 힘들 때 운동으로 이겨내거든요"

"아.. 네.. 한번 해볼게요"

"네 술 드시는 거보다 운동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천천히 회복하세요 기다릴게요"


거리에서 고작 1분가량 마주쳤던 사람에게 조언을 듣고 있다 보니 기분이 묘했다.

너무나 지쳐있는 내가 안돼 보였는지 싸이코 시나리오 작가가 남자를 통해 건네는 응원의 메세지 같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들은 분명 지나가고 있다.


어느 순간 심장이 아픈 게 사라졌고

이젠 떡볶이 1인분과 튀김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게다가 가면을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랑 웃고 떠들 수 있다.


나는 분명 다시 재생하고 있고

다시 나다워지고 있다.




오늘 집 앞을 산책하다 하천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작년 10월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을 계약하기 직전에 간발의 차이로 다른 세입자에게 집을 빼앗겼던 사건이 생각났다.


그 당시의 나는 지금처럼 하천에 앉아 다시는 구할 수 없는 조건의 집을 놓친 억울함과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놓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몇 개월 뒤,

그때보다 훨씬 좋은 집을 우연히 발견하였고 곧 다른 세입자가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길래 지난날의 실패의 고통을 겪었던 나는 전화 한 통만으로 빠르게 판단하고 바로 계약금을 입금해 이 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전의 뼈아픈 경험으로 천금같이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이 한 번 더 찾아온다면 절대로 지난날의 똑같은 과오 따위로 놓치지 않을 거다.


싸이코 시나리오 작가가 나에게 속삭였다.

"진짜 인연은 다음씬에 따로 준비해놨어~

이번 실패를 연습 삼아 절대로 놓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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