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서로 각자의 아픔을 꾹꾹 눌러 담고, 속으로 삭이며 아빠 없는 세상을 버텨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정신을 못 차렸다.
당분간은 동생이 엄마를 모시기로 했고, 그렇게 우리는 잠시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상실을 감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 엄마가 밤에 실례를 해…”
순간 깜짝 놀랐다. 엄마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동생과 나는 엄마를 산부인과로 조심스럽게 모시고 갔다.
“셋이 같이 진료 보면 좋을 것 같아”라는 핑계로.
처음엔 손사래를 치시던 엄마도 결국 진료를 보셨고, 약 처방도 받으셨다.
의사 선생님은 밤에는 디펜드(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하는 게 낫겠다고 조심스레 권했다.
그 말을 어떻게 엄마께 전해야 할지, 동생과 나는 머리를 맞댔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자연스러운 톤으로 말을 꺼냈다.
“엄마, 요즘 밤에 화장실 가는 거 귀찮지?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잖아.”
“왜?”
“아니, 진영이도 요즘 밤에 귀찮아서 기저 귀하고 잔대~”
“뭐? 에구 망측해라!”
“아냐. 병원 선생님도 오히려 그게 낫다고 하셨어.”
“진영아~ 이리 와봐. 너 지금 그거 했어?”
“응! 편해. 엄마도 해봐. 그냥 푹신한 빤스라고 생각해.”
그러더니 진영이는 바지를 내리고 모델처럼 엉덩이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괜찮네. 이거 요즘 유행이래. 엄마, 예쁘다~ 오늘 입자, 응?”
엄마는 머뭇거리다 마침내 작게 대답하셨다.
“… 그래. 알았어.”
그렇게 ‘엄마 디펜드 입히기 대작전’은 성공했다.
배우자를 잃은 뒤 우울감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치매를 앓는 엄마에겐 더 가혹했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 앞에선 꿋꿋했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안쓰럽고, 미안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응원뿐이었다.
그즈음, 나는 무작정 제주도로 떠났다.
고등학생인 아이들을 두고, 남편을 두고… 이기적인 엄마였다.
하지만 나는 살고 싶었고, 살아야 했기에 제주를 선택했다.
아빠를 잃은 뒤 밀려오는 우울을 견딜 수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제주도라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도착하자마자 한라병원에 특채로 채용됐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아빠 생각을 조금씩 덜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땐 아빠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을 만큼 바빴다.
사십 넘어 시작한 삼 교대 병원 근무는 아픔을 잊기에 충분했다.
휴일엔 오름에 오르고, 절물휴양림 나무 사이에 해먹을 걸고 책을 읽었다.
신선처럼, 그럭저럭 살아냈다.
매주 일요일엔 엄마와 통화하며 전국노래자랑을 함께 봤다.
엄마 없는 제주에서, 그 시간만큼은 엄마와 함께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3년.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서 육지로 갔다.
주간보호센터에 계신 엄마를 모시고 카페에 들렀다.
엄마는 여전히 자식들은 기억하셨지만, 치아 하나가 빠져 있었다.
“엄마, 언제 이 빠졌어?”
“내가 이가 빠졌어?”
그 말에 가슴이 울컥했다.
이빨 하나 빠진 것도 모르고 지내는 엄마를 보며, 아빠처럼 엄마도 잃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제주로 돌아간 나는 바로 사직서를 냈다.
이제 엄마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2019년 1월 3일, 이삿짐을 싸서 제주를 떠났다.
이삿짐과 내차를 싣고 배가 육지로 향했다.
그런데 완도에 도착하자마자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은영아, 어디야?”
“지금 배가 완도에 도착했어. 이제 원주로 출발하려 해. 명랑한 춘자 씨는 유치원(주간보호센터) 갔어?”
“… 은영아, 엄마가 심장마비로 지금 응급실로 가고 있어.”
난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하나님조차.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 편의점에서 담배를 샀다.
피워본 적도 없는데, 그 연기가 마음을 잠시라도 눌러줄 것 같았다.
하지만 매운 연기에 눈물만 더 쏟아졌다.
운전대를 잡고 원주로 향했다.
‘엄마, 제발…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 아빠처럼 그냥 가지 마…’ 제발…. 난 이제 어떡하라고…..
그렇게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 원주 기독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반.
엄마는 내가 도착하기 30분 전에, 아빠에게 가셨다.
나는 아빠의 임종도, 엄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가는 길이 힘들까 봐, 우리가 또 오랜 시간 힘들까 봐, 그냥 빨리 가버리신 게 아닐까…’
엄마도, 마지막 순간엔 우리 자식들이 제일 보고 싶지 않았을까?
장례를 치르고, 엄마 없는 집에서 며칠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땅속 깊은 곳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