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아파한다. 고통에 대한 역치가 다르니까.
역치란, 생명체가 자극에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이다. 어떤 사람은 넘어져도 옷자락을 털고 금방 일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옷을 걷어내고 그 상처를 한 참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폭풍 속에서도 한걸음 내딛지만 어떤 사람은 스치는 바람에도 움츠러든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나만 넘어진 것은 아니었다. 다들 자신만의 속도로 걷거나 뛰다가 간혹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서 일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들 안 아픈 걸까. 나만 이렇게 유난인 걸까. 나는 온통 모든 감각이 통각에 집중되어 있는 인간 같았고 유독 잘 삐끗했다. 뛰는 건 엄두가 안 났고 걸을 때조차도 늘 두 발은 무거웠으며,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신경을 거스르는 저릿한 고통이 함께했다.
인간은 원래 아프다.라고 누가 말했다. 아프면서 어른이 되는 거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고 배웠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밀려오는 파도를 헤쳐나가는 것이고 어른이 될수록 그 파도가 밀려오는 간격은 더 짧고 높아지는 것이라 했다. 원래 다들 그렇다고.
그렇구나. 다들 아픈 거였다. 다만, 어렸을 때는 아프다고 말하고 엉엉 울며 마음껏 아플 수 있었다면, 이제는 약을 먹고, 참고, 아픈 걸 버텨내며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게 달라진 점이었다. 그게 어른스러운 것이니까.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에너지가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고통에 무감각 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내가 배운 '어른의 삶'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괜찮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괜찮지 않은 것보다 괜찮지 않은 상태인걸 들키는 게 몇 배는 더 두려웠다.
그래서 괜찮은 척했다. 마음 한편에서 늘 울고 싶은 괴로움을 깊은 서랍 속에 넣어두고 열쇠도 없이 잠가버렸다. 별로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일상이 지속되길 버텨가며, 오늘 하루도 무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 언젠가 괜찮아질 것이라 믿었다.
결국, 내가 기다린 나의 봄은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었다. 불안, 걱정 따위가 아니라 나도 남들처럼 여유를 갖는 것이었다.
'봄은 소리 없이 온다'는 문구가 머리를 스쳤다. 나는 도무지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아 그래서, 봄은 소리 없이 오고 떠나서 봄인 줄도 모르고 몇 번이고 그저 스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 어쩌면 내가 내 삶을 견디기 위해 화면을 끄고 무음설정을 해 둬서 봄이 보낸 주파수를 맞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글을 쓰며 천천히 내 마음의 리모컨을 켠다. 지금부터 내 안의 스쳐간 봄의 흔적을 들여다보려 한다. 그리고 다가올 봄을 쫓으려 한다.
빼앗긴 글의 봄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