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 오랜만에 박스 하나를 꺼냈다. 그 박스에는 내가 교직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쓴 교무수첩과 중요한 것을 적은 메모, 아이들로부터 받은 쪽지, 편지 등이 들어있었다. 나는 해묵은 기록들을 건져 올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학교로 돌아온 이후, 학교는 어떻게 바뀌었나. 나는 어떻게 변했나.
처음 학교에 왔을 때, 낮은 성과로 좌절했을 때, 학생들을 지도해서 큰 상을 받았을 때 등 학교 안에서 울고 웃었던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작은 엽서 하나, 교무수첩의 한 줄 한 줄을 꼼꼼히 읽으며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론은,
'사실 크게 변한 건 없다.'였다.
나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만 웃음이 났다. 나는 여전히 나였고, 학교는 여전히 학교였다. 나는 여전히 아픈 열일곱의 자신을 안고 사는 어른이었고 학교는 여전히 아이들을 울게 하고 또 웃게 했다. 그럼 그간의 나의 노력이나 시도들은 모두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나. 그것 또한 아니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는 것이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문구인데 그 글귀처럼 학교에서의 시간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이없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벽도 생각을 바꿔 눕혀버린다면 사람들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된다는 그 문구. 그러니 벽을 다리로 바꾸는 희망의 공간이 어쩌면 학교가 지향해야 할 바 중 하나 아닐까.
되돌이켜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0교시에 졸면서 베니스의 상인을 읽던 소녀는 방과 후에 EBS의 수능특강을 수업하는 이비에스의 상인으로 거듭났다.
'학교 망해라'를 외치던 자퇴 희망자는 '학교 변해라'를 외치며 더 나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른이 되었다.펄럭이는 국기게양대의 태극기를 보며 울던그 두 눈으로,흔들리며 피는 꽃들이 피 흘리진 않도록 지켜보며말이다. 그래서 때론 여린 이파리들과 같이 바람을 맞고 때론 함께 뜨거운 햇볕을막아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그렇게 가장 설익고 약한나는 학교 안에서 학교와 함께 성장한 것이었다.그리고 그 곁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학생, 교사, 학부모.사람, 사람, 사람들, 그리고 사랑.
학교는 사랑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부장 선생님의 말이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조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밤새 그 생각들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글로 써내려 나갔다.한참을 쓰다 보니 마음이 차분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아침도출근했다.출근한 자리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다름 아닌 한 장의 편지였다.
그 편지는 내가 담당했던 한 교생 실습생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녀는 나와 전혀 접점이 없는 존재였다.
우리 고등학교 출신도 아니었고, 내게 배운 적 있는 학생도 아니었다. 나와 다른 대학교에 재학 중이며우리 전공은 복수 전공이라고 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대학교에서 교생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어떤 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아서 겨우 겨우 구해 온 곳이라고 무사히 교생실습을 나올 수 있었음에 감사해하며 다소 쑥스러워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조금 짠했고, 또 응원하고 싶었다. 나도 병아리 교사인 주제에 교생 선생님을 담당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느꼈지만, 어쨌건 그녀는 운명처럼 내게 배정되었다. 나는 한 달간 그녀와 같이 공부하고 함께 배워나가겠노라 다짐하며 5월 한 달을 달려 나갔다. 그 한 달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봄의 한 자락이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오랜만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흔한 안부의 인사와 소식을 전하는 말 뒤에내 눈길을 끄는 한 문장이 자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