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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Aug 31. 2023

가끔은 러시아의 근로자가 되고 싶어요

워라밸이 어마어마한 러시아인 직원들

우리나라 직장 문화가 많이 좋아졌다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소한 지금 내가 있는 이 직장, 이 부서에서는 '워라밸'이 거의 잘 안 지켜지는 편이다. 10시 퇴근도 잦고, 어쩔 땐 12시에 넘어서 집에 가는 시즌도 많아서 가끔은 9시에 집에 갈 땐, "와, 오늘 일찍 간다" 하고 기쁜 마음마저 생기기도 한다.


더욱이, 오늘처럼 드론이 여기저기 6발 떨어진 날에는 본사에 보고를 하느라, 휴가 쓴 날이지만 그림판을 켜서 지도에 드론이 떨어진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비상상황에서 내 휴가보다는 그런 게 중요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참 뼛속까지 직장인인가 싶으면서도,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이렇게 내 신변이 위험하기도 하고 내 심신이 지치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내 소임을 다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미치지 않을 것 같은 범위 내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최소 우리 사무실의 한국에서 파견 나오신 모든 분들이 그렇게 회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야근도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한편, 러시아인들을 보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워라밸'과 '나 자신'이 중요한 사람들 같단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회사를 더 중시하는 문화'에 조금은 더 익숙하다 보니 가끔은, ‘회사입장에서 봤을 때의 개인주의적 태도‘ 를 가진 러시아인 직원을 당황스러워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러시아인들의 태도가 나쁘다곤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찌 보면 지향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싶다.


비단 우리 회사의 러시아인뿐 아니라, 러시아인 친구들이나 나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러시아인을 봐도 '내 업무의 범위' 그리고 '내 업무 시간'을 칼같이 지키고 싶어 하시는데, 어쩔 땐 솔직한 마음으로 나도 저렇게 일해도 괜찮은 사회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카페에 가도, 좁은 주방에서 커피 만드는 사람이 아무리 바빠도 설거지하는 사람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도와주지 않는 걸 보며 놀란 적도 있다. 그리고 어제는 본인이 초과근무를 한다고 고객인 나에게 화를 낸 러시아인도 있었다. (내가 무슨 죄라고?)



어떻게 이런 문화가 생길 수 있었을까? 하고 고민해 보았다.




역사적으로 보나..

아무래도 과거로 올라가 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황실이 무너지고 소련이 세워질 때,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이 가장 많이 외쳤던 단어 중 하나가 '노동자!!!'라는 걸 얼마 전 역사 수업 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노동자가 중시됐던 소련의 시대가 약 70년이 이어지다 1991년 지금의 러시아가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여전히 '노동자 중심' 사고가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노동자의 세상” 이라는 소련 시절 포스터


법적으로 보나..
한국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6개월 이상 근무한 근로자는 모두 연간 최소 28일의 유급 휴가를 보장받는데, 1년에 1번은 최소 14일을 연속으로 써야 한다.

'오래 쉬어야 한다'니.. 모든 직장인들이 사랑스러워할 만한 의무사항이다. 심지어 극동지역이나 기후적으로 근무가 어려운 지역의 경우는 28일이 아니라 35일가량 쉴 수 있도록 해당 연방주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병가의 경우는 직원들이 병원에서 진단서만 떼오면 며칠이건 줘야 한다. 병가 기간 동안 직원을 해고할 수 없다. 그리고 육아휴직은 출산휴가(출산예정일 전후로 70일이 주어지는 것)와 별도로, 3년이 주어지는데, 본인이 원할 때 언제든 복귀 가능하며 휴직 기간 중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는다.


나의 경우 무료 초과근무, 휴일근무를 상시 제공하는데, 러시아 노동법을 보면 이런 것들도 무섭도록 규제하고 있다.


초과근무 및 휴일근로는 노동법에 명시된 상황이 아닌 경우가 아니면 근무를 요구할 수 없으며, 그 명시된 상황이라 하더라도 근로자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초과근무는 2일당 4시간, 연간 120을 초과할 수 없으며, 첫 2시간의 초과근무에 대해선 1.5배, 그 이상으로 근무하면 2배 이상 돈을 줘야 한다.


내 친구만 하더라도 무료로 30분만 더 일해도 '야근했다'라고 화가 나있었는데 이래서일까 싶었다. 우리 사무실 직원들도 6:00:00에 퇴근하는 직원이 많은데 어쩔 땐 참 부럽기도 하다.


근데 너무 신기한 건, 그렇게 해도 불편할 뿐, 엄청 큰일날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초과근무를 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이 잘못된 것이므로, 그걸 바로 잡으려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이 많으면 야근을 하는 것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참 부러운 문화다 싶기도 했다. 모든 직장인들이 이런 문화를 원할텐데 왜 쉽게 바뀌지 않는 걸까 싶기도 했고.


해고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불과하며, 그 경우에 해당되는 충분한 증거기 있어야 하므로, 러시아에선 미국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너 해고야' 이런 건 있을 수 없다.




글을 쓰다 보니, 역사와 문화가 법에 반영이 되었고,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 법 모든 게 반영이 되니 근로자의 워라밸이 지켜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휴가를 쓰고도 비록 일을 했지만,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반이었다. 이렇게 빨리 퇴근을 하니,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먹으며 찬찬히 얘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며칠간 미뤄왔던 청소기도 돌리고, 빨래도 했는데 시간이 남아 이렇게 차분히 차 한잔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이리 글을 쓰고 있다.


 '회사'가 있기 전에 '나'도 있어야 일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건데, 쉽게 역전되는 이 문화를 어찌하면 좋을꼬, 생각하다 보니 '가끔은 정말, 러시아의 근로자가 되고 싶다.'




(덧) 가끔 들어보면, 우리처럼 빡세게 일하는 러시아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느끼고 겪은 것들을 바탕으로 쓴 것이니 이점은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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