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삽니다>
남녀공학 중학교라면 으레 하나씩 있다고들 하는 좀 노는 친구들. 우리 학교에도 노는 친구들 무리가 있었다. 사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건 아니었다. 그저 치마가 남들보다 짧고, 바지통이 좁고, 주로 몰려다니며, 틴트를 진하게 발랐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정의 내린 것이었다.
그들 중 하림이 있었다.
하림은 확실히 선생님이 좋아할 유형의 학생은 아니었다. 툭하면 선생님과 부딪치기 일쑤였고 그보다 더 자주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가끔 수업시간 도중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거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교실 밖으로 나가면 복도에서 하림을 마주치고는 했다. 하림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창문 밖 운동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 다녔다. 목적지 같은 건 없는 것 같았다. 수업으로 분주한 교실을 지나치며 텅 빈 복도를 유유히 걸었다. 수업은 남의 나라 이야기라는 듯, 꼭 마실 나온 수위 아저씨처럼 평온하게.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수업이라는 것을 듣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번쩍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성적이 빠르게 오르는 역사와 사회를 공략했다. 등수가 올라가는 것이 눈에 보이니 신이 났다.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이제부터 ‘공부하는 학생’이 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온갖 유난이란 유난은 다 떨며 공부를 했다. 쉬는 시간에 이어폰을 꼽고, 자습시간에 떠드는 사람이 있으면 쪼르르 선생님께 일러바쳤다. 피구에 죽고 피구에 사는 피구부 주장에서 꼴 보기 싫은 밉상 반장이 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서서히 나를 ‘건드리지 않기’ 시작했다.
성적에 목메고 선생님에게 예쁨 받으려고 노력하는 모범생은 피구부 주장보다는 매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랬고 사실 졸업을 앞두고 전체적으로 관계들이 점점 간소화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볼 사이, 여기까지인 사이. 애매한 친구들은 멀어지고 가까운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그 허전함 때문에 더더욱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중학교 마지막 기말고사를 막 치른 가을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영어 그룹과외에서 받아온 숙제 더미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였다.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하림이 벌떡 일어나더니 교복 재킷을 벗으며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게 다가오는 하림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제 교복 재킷으로 내 무릎을 덮어주고는 그는 의자 옆 차가운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반장, 영어공부는 어떻게 하는 거야?”
하림의 입에서 영어공부라는 말이 나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하림과 내가 ‘그’ 주제로 이야기를 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실 나는 하림의 고교 진학이 어렵다는 걸 엿들어 알고 있었다. 언젠가 교무실에 내려갔는데, 하림과 담임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네 백분위로는 아마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가 힘들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방법을 찾아봐야지, 수도권 밖으로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고.”
하림의 심각한 표정을 처음 봤다고 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조용히 교무실에서 나가 교실에서 하던 공부를 마저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까지 가져갈 친구가 아니었다. 그러니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기뻤다.
물어봐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게 건넨 한마디는 그의 최선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내게 와줘서 고마웠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지금까지도 정의 내릴 순 없지만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기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희망찬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영어 그룹과외를 하고 있는데, 거기 선생님이 그러셨어. 맨날 수업시간에 잠만 자던 제자 중에 한 명이 고3 때 갑자기 정신을 차려서는 미친 듯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대. 그리고 그 해에 성균관대 합격했대! 딱 1년만 열심히 해도 대학 갈 수 있다는 거지.”
“너하고 싶은 게 뭐야? 애기들 좋아해? 초등학교 선생님은 어때? 교대만 가면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사범대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못한대. 그런 걸 잘 생각해야 해.”
“내가 괜찮은 영어 문법 참고서를 알고 있어. 내가 지금 보고 있는데, 정리가 잘 돼있더라고. 나랑 진도 정해서 매일 풀어오기 할까?"
꼭 모험담을 들려주는 사람처럼 신이 나서 얘기하는데, 하림은 가만히 내 얼굴을 보며 웃었다. 내가 하림의 구원자라도 된 듯한 으쓱함이었을까, 우리는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벅찬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하림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림과 나는 졸업을 마지막으로 다시 보지 못했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그러했듯 하림의 삶도 쉽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린 열여섯이었다. 열여섯! 우주비행사를 꿈꿔도 UN 사무총장을 꿈꿔도 충분한 나이였다. 그때 우리는 정말 못할 것이 없었다. 내가 그때 그 사실을 그 애한테 말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바보같이 짐작만 하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어리고, 너는 뭐든 될 수 있다고. 고등학교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그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야기를 못해준 게 마음에 걸려 오늘도 하림이 생각이 났다.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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