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 미술 좀 알려줘

<대치동 삽니다>

by 수레 soore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적혀있는 나의 취미 사항은


‘수학 문제 풀기’였다.




입학사정관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짜 말고, 진짜 취미가 없다는 건 어느 순간부터 부담이었다. 꼭 인생을 즐기며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모두가 나처럼 죽기 살기로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줄 알았는데, 공부만 했던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피아노, 기타, 노래, 드럼, 그림……. 다들 멋들어진 취미 하나씩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모두 각자가 가지고 있던 특기 내지 흥미에 따라 동아리에 들어갔다. 잘하든 못하든 들어가서 배우면 된다고 자신 있게 연극부에 지원한 친구를 보고 나는 (필요 이상으로)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 잘하는 건 고사하고 좋아하는 것조차 없으면 어쩌자는 말인가. ‘나도 배워보면 그만이지’를 던져놓고 그 친구와 함께 연극부에 가입했다. 물론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정기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는 유령회원이 되었다. 다시 말해, 취미를 찾는 건 실패했다는 의미다. 자신 있게 연극부에 지원했던 그 친구는 전공을 버리고 연기자를 꿈꾸고 있었다. 아, 그녀 역시 취미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취미를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숨을 가다듬고 앉아 피아노를 쳤을 땐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나름 4년 차 연주자였다. 꺄르륵거리며 ‘담배’ 피아노 학원이라고 부르곤 했던 담비 피아노 학원을 거쳐, 7살 무렵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를 와서는 상가 피아노 학원부터 등록했더랬다. 눈에 띄게 성장이 더딘 실력이었다. 끝까지 샵과 플랫을 이해하지 못한 마지막 학생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피아노가 좋았다. 원장 선생님은 무섭고 하농은 지겨웠지만 그랬다.

상가 5층엔 영어학원이 있었다. 아마 피아노 학원 원장님은 몰랐을 것이다. 학원의 최대 라이벌은 같은 3층에 위치한 바이올린 학원이 아니라, 5층 영어학원이라는 것을.

영어학원에 등록하면서 짧은 피아노 연주자의 역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영어 수업 듣고 숙제하느라 바쁠 텐데 발전도 없는 피아노는 이제 그만하자는 걸로 의견이 모아진 모양이었다.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국영수 중심’의 일과는 십 년 동안 이어졌다.




“언니, 나 미술 좀 알려줘.”


독서실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며 만난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 언니가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았을 때, ‘취미 없음'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약학과에 재학 중인 언니가 취미로 그렸다며 보여준 그림은 미대생의 그림에 견주어도 부족한 게 없었다.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본업과 취미가 완벽히 분리된 사람이라니, 심지어 둘 모두 뛰어나다니! 본업도 취미도 흐물흐물한 나로서는 부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운 날씨에 낑낑대며 미술재료를 모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도에서 멋들어진 포즈를 잡은 우리 엄마를 그리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계획은 호기로웠다. 흰 캔버스 앞에 앉아 연필을 쥐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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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나서 알아버렸다. 나는 조금도, 개미 똥구멍만큼도 소질이 없다는 것을.


나는 처음 그리는 것 치고도 못 그리는 사람이었다. 붓질 한 번을 할 때마다 (거의) 미대 언니의 수습용 붓질 여섯 번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힘으로 제대로 된 그림 하나를 그리고 싶어 졌다.


못해도 되는 게 취미라면 나는 미술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늘은 언니가 다했다. 오늘 우리가 완성한 그림에 내가 기여한 건 2.2%에 불과하지만, 이 설렘이 좋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마 그건,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나에게도 취미가, 취미가 생긴 것이다.


KakaoTalk_20200820_021833262.jpg 방 한 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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