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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레 soore Oct 28. 2020

너를 위해 내리는 눈


웁살라 대학교 기숙사 플록스타 6동 7층 코리도에는 두 부류의 학생들이 있다. 일정이 바쁜 사람, 일정 없이 한가한 사람. 난 우리 중 가장 후자에 가까운 후자였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있는 두 시간짜리 수업을 가거나 기숙사에서 20분쯤 떨어져 있는 대형마트로 산책을 겸한 장을 보러 갈 때 빼고는 거의 기숙사에 붙어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수업이 없는 사람들끼리 아침부터 공용 주방에 모였다. 1kg에 1200원 주고 산 사과를 껍질 채로 아작아작 먹으며 한가한 사람들끼리 코리도 파티를 계획했다. 프랑스에서 온 사람, 독일에서 온 사람, 한국에서 온 사람,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람… 별별 국적이 다 모였겠다 각자 제일 자신 있는 요리를 해오자며 신나게 이야기하던 그때, 활짝 열어놓은 창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갑자기 불어오는 돌풍에 문을 닫으려 황급히 창문에 다가갔을 때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얘들아... 밖에 눈이 와.”     


모두들 각자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 황급히 창문에 붙었다. 벌써 3월 중순이 다됐는데 눈폭풍이라니. 한숨이 푹 나왔다.      


“이제 좀 봄이 오나 했더니, 또 시작이네. 지겹다 지겨워.”     


이 지겨운 패딩은 언제나 벗어보나


두터운 눈이 내리는 것을 보니 이번 달에도 봄이 오기는 그른 모양이었다. 며칠간 이어졌던 따뜻한 날씨가 꿈같았다. 기온이 다시 영하로 떨어졌다. 이제 좀 패딩을 벗어보나 했는데, 하얗게 세상을 수놓는 눈이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주방에 아무도 없었다. 뜨거운 물에 원두를 넣고 휘휘 저으며 홀로 가만히 앉았다. 창문 밖에 보이는 눈 쌓인 거리에 한숨을 푹푹 쉬던 그때, 며칠  탄자니아에서 교환학생으로 웁살라에  자이 Zainab 장갑이며 목도리며 중무장을 하고서는 신나서 뛰어왔다.     


“눈 온 거 봤어? 태어나서 눈은 처음 봐! 어쩜 그렇게 하얗고 따뜻한지. 평생 못 볼 줄 알았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녀에겐 이 눈이 선물이었던 것이다.     


3월에 교환학생 파견이 결정되고, 내심 실망했더랬다. 이미 눈이  그치고 겨울이 지나가버렸을까 . 그래도 희망을 버릴  없어 택한 스웨덴이었다. 그녀가 5년간 몸담은 의학과에는 교환학생 제도가 활성화되어있지 않았는데, 졸업 전에 약혼을 하게 되는 바람에  기회가 소중했다.  달간의 짧은 교환학생 생활이 끝나면 학교생활을 마무리하고 약혼자가 사는 케냐로 넘어간다고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소용돌이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삶이다. 졸업하기 전에  눈을 보고 싶다고  소원이 마법처럼 이루어졌다.



탄자니아에서부터 휴대용 다지기를 가져왔다. 공용 주방에 놓고는 다들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사 들어오던 그날부터 눈이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였다. 내가 그녀의 이름 Zainab을 잘 발음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애칭으로 자이 Zai라고 부르곤 한다며 자이가 되었다. 자기 몸 만 한 짐을 가지고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몸이 천근만근 피곤할 텐데 나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서랍은 어디인지, 샤워기는 어떻게 쓰는지, 공용 식기는 어디에 있고 요리는 어떻게 하는 건지. 조그만 체구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당찬 그녀가 좋았다.     


“간만의 눈은 너를 위한 거였나 보다. 고마워, 덕분에 오늘이 특별해졌어.”     


이곳에서도 한국에 돌아가서도, 눈이 오면 그녀를 생각할 것 같았다.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면 케냐에서 직장을 구할 거라던 그녀가 다시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맞이할 수 있을까, 호기심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그녀가 벌써 엄마가 됐을까.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기억할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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