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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Mar 28. 2024

랄라(2)

소설<PART-two> #착시③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었던 P동은 묵은 때를 지워내고 샌드위치 형태로 층층히 서있다. 지붕이 평평한 백색의 건축물 위로 S시와 G시를 경계짓는 산등성이가 저만치 물러나 보였다.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두 개의 후문 중 하나의 출입구에 붙어 있는데다 취사가 가능하다는 편의성으로 P동은 이용자들로부터 꽤나 사랑받았다. 입주단체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이용도 잦은 탓에 대관 예약율과 재이용률이 가장 높은 공간이었다. 입주단체 중 하나인 요리연구회에서 주 2회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 우리 농산물 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식재료를 이용한 건강식을 만들어 판매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주민 이용도가 특히 높았다. 시대의 요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옛 행정시설을 개보수하여 사용하고 있는 P동은 최근 지어진 신식 건물들에 비하여 폐쇄적으로 느껴지는 구조였지만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이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인식했다. 랄라는 습관처럼 우여곡절 끝에 되살아난 P동 앞에 설 때면 건물을 허물고 휘향찬란한 호텔과 아케이드를 지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먼지태풍 속에 서 있는 자신과 함께 떠올려보곤 했다. 랄라는 현재의 자족감을 극대화하고 싶을 때면 그 정반대의 상황을 가정해보는 편이었다. P동에는 구내식당이라는 간결한 기능과 여백이 알맞게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랄라는 P동 2층에 들어서서 타일바닥의 한 단 위로 깔려진 마룻바닥을 볼 때면 꼭 풀다 만 숙제 처럼 매번 아쉬웠다. 커뮤니티 시설이라는 사용취지에 걸맞는 무드를 공간에 담아내는 덴 확실히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공사비로 한정된 예산에서 붙박이 목공가구나 주방설비 외 운영상 필요한 부가적인 인테리어 비용은 턱없이 부족했다. 공간은 늘상 비어보였고 이를 딱히 여긴 누군가 무료나눔한 빈백 다섯개만 이 마룻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였다. 마룻바닥을 남겨둔 덕으로 단지 내 타 공간들과 다른 비사무적 기능임은 확실히 드러났지만 바닥난방이 안되는 탓에 썰렁한 기운이 매쾌한 연기가 피워오르는 것처럼 공간 전체에서 풍겨났다. 꽤 많은 인원이 모여 앉은 전직원 워크숍의 분위기도 그랬다. 그것이 오로지 공간 때문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룻바닥에는 경영지원실, 입주지원실, 정책기획실 등 3개실에다 보안 및 미화 등 시설관리직을 대표하여 참석한 시설관리단장, 모법인 직원 3인까지 도합 36명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빼곡히 모였다. 센터 개소 이후 벌써 3번째 전직원 워크숍이었다. 50여평의 마룻바닥은 인원수에 알맞았음에도 중간 중간 기둥 구조물이 있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한쪽 구석에 몰려 앉게 되었다. 한참 부족한 빈백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고 저만치 밀려나있다. 직원들은 불편한 내색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고 은박돗자리를 깔고 앉거나 얇은 방석을 깔고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벽과 기둥 곳곳에 기대 앉아 흡사 연극무대처럼 꾸며진 쪽을 무표정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난방기는 아쉽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1월 찬바람에는 효용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단열재를 뚫고 들어온 찬바람이 공기 중에 내내 스며들었다. 마룻바닥에 모여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신발은 벗었지만 웃옷까지는 벗지 못했다. 민지처럼 쭈그려 앉아 시린 발가락 끝을 부여잡고 앉았다. 


공석인 센터장을 대신해 모법인의 대표가 주재하는 워크숍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전동스크린을 가운데 두고 양 사이드로 의자에 기대 앉은 사무국장 뮬과 승곤이 보였다. 이 워크숍은 모법인에서 전체 기획하고 준비한 내부 행사였다. 센터 직원들의 일거리를 줄여 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과반 이상의 직원들에게는 두번째 전직원 대상 워크숍이었고 참석자 중 대다수는 워크숍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시간 진행되는 일정이었지만 업무시간에 진행되는 탓에 사람들의 표나는 불평은 면했다.  


랄라는 워크숍 메인 장소인 2층 입구에 나란히 펼쳐진 듀라테이블 위를 한참 서성거렸다. 뮬의 진두지휘 하에 정성껏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다과를 둘러보느라 그런 것이었다. 깊이가 깊은 스틸 냄비에서 보글보글 끊고 있는 주홍빛깔의 당근스프가 공기 중에 온기를 더했다. 그 옆으로 커피와 홍차 라고 네임텍이 붙은 업소용 보온병 4통이 가지런히 놓였다. 보온병 앞에는 색색깔의 다과가 열에 맞춰 박스 안에 담겼다. 이 다과들을 내보며 랄라는 센터장 C와 실장 P가 주재했던 두번째 워크숍을 떠올렸다. 아니 그보다, 어느 행사장에서 남은 다과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와 부려진 듯 흩어져있던 과자 봉다리들과 패트병들을 둘러보며 센스가 없으면 대체로 일도 못한다고 흉을 보던 나인을 떠올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흉을 보던 와중에도 과자 하나를 집어 들고 홀랑 까먹으며 자리로 돌아가던 나인은 지금 꽤나 심각해보였다. 사람들에게 실없이 말을 잘 거는 편인 나인이 오늘은 어쩐지 말도 별로 없다. 그 한참 뒤쪽에서 실장P가 무표정하게 누군가에게 톡을 보내고 있는 게 보였다. 1층 식당에서 시설관리직 직원 41명을 포함한 그야말로 전직원 점심식사가 거하게 진행된 후였다. 점심식사로는 콩고기를 메인 디쉬로 하는 쌈밥정식이 나왔다. 모법인 대표인 승곤의 신년 인사와 당부말씀을 듣는 오전 프로그램에 이어 지난해 사업 평가 공유와 신년 계획에 대한 사무국장 뮬의 발제를 듣고 테이블별로 토의 후 의견을 개진하는 프로그램이 남아있었다. 


랄라는 신발을 벗고 마루바닥에 올라서며 이가 빠진듯 민지가 오전내 앉았던 빈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법인에서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한 탓에 센터장 자리는 한 달째 부재상태였다. 휴일 3일을 끼고 연달아 열린 종무식과 시무식은 경영지원실장의 ‘수고하셨습니다’와 ‘수고해주세요’라는 말로 갈음되었다. 전 직원이 이용하는 슬랙 전체대화방에서였다. 센터장 C는 2017년 12월 14일쯤 돌연 사직을 밝혔다. 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법인 사무국으로 제출된 다음날이었다. 그는 일신상 변화에 대하여 일언반구의 말 한마디없이 슬랙대화방을 홀연히 떠났다. 센터장의 사직 소식은 며칠 후인 다음 월요일에서야 센터를 방문한 법인의 사무국장 뮬에 의해 전직원에게 알려졌다. 모두는 센터장 C가 14일 퇴근 이후 슬랙의 모든 대화방에서 존재 삭제를 시연했을 때를 ‘그 쯤’으로 짐작했다. 센터 내부 그 누구도 이유와 때를 알 수 없는 조용한 사직이었고 그보다는 중력을 잃은 추가 바닥 모르고 추락하는 것과 같은 맹렬한 도피에 가까웠다. 그는 어떤 차원의 시공간에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초연결사회의 편리를 편취했다. 물론 그의 의도대로만은 되지 않았다. 그가 맡은 역할이 그만큼 막중했다. 남겨진 센터 직원들은 한동안 말문이 막혀 의도적으로 말을 아꼈다. 침묵은 워터마크처럼 상흔을 남겼다. 그러므로 랄라는 센터장 C에 대하여 야박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꼭 자신뿐인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자 뭐가 그리 급해 인사도 없이 떠나느냐며 흘리듯 말하는 직원들이 생겨났다. 그 말은 듣기에 따라 꼭 우리가 그 정도 사이 밖에 안되냐는 핀잔처럼 들리기도 했다. 센터장 C를 따르던 남자 직원 몇과 센터에서 연로한 축에 속하는 경영지원실장은 그렇게 푸념하는 그를 묘하게 옹호하는 말을 늘어놨다. 수지타산 따위 따져묻는 관계는 이미 아니라는 단정 하에 저간의 사정쯤 넓은 마음으로 양해는 한다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하는 그렇고 그런 훈장 선생 같은 말씀이었다. 랄라는 그런 비공식적으로 날라드는 핀잔을 들을 때면 역으로 비즈니스 관계에서 의례적 인사따위 생략될 수 있는 것이고, 사직이야 인사권을 쥔 모법인에 절차에 맞게 통보만 되면 문제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공식으로 나오는 말들은 가만 들어보면 다 깎아내리고 문제 삼기 위한 말들이었다. 그렇게 차떼고 포떼고 나면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되지 않을 일들 투성이 같았다. 그렇게 머리 속에서 인류애적 평화가 선언될 때마다 랄라는 이상하게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화의 형태로 분출되는 근원 모를 감정을 다스리느라 랄라는 꽤 애를 먹었다.


랄라는 가끔 이 무형의 조직체가 가부장적이고 경제적으로도 무능한 가장 같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애증의 관계에 놓인 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무능한 리더 개인의 특성이 조직 전체로 묻어나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조직이었다. 그만큼 작은 신생조직이니까. 각 개인의 장점이 문화에 드러나는 한편,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유연한 조직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 작은 신생조직의 메리트 중 하나일터이지만 어쩐지 그 효과는 로또 번호처럼 어긋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실속 없이 한껏 치장된 남성 리더십들은 혹시 모를 ‘모’의 결과를 위해 공동체의 자산을 희생시키며 몇번이고 대게 ‘도’의 결과를 창출해냈다. 이 과감한 감행은 때되면 의례로라도 해야할 말은 무시로 생략되고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는 그려러니 하고 넘겨버릴 줄 아는 미덕을 문화로 자리잡아 가는데 효과적이었다. 형편 없는 결과는 쓰레기통에 쳐박히고 모두의 존립기반이 형해화되는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즐거운 과정인 것으로 쉽게 재무장되었다. 어느 순간에고 나는 도망칠테니 너희도 알아서 도망쳐 말하는 이 무책임한 책임자에게 사람들은 그럼에도 우리를 지키느라 고생한 가장인 것처럼 관대했다. 랄라는 목표와 전략설정, 조직원 동기부여와 조직운영, 성과 및 위험관리, 대외협력 등 모든 면에서 센터장 C에게 낙제점을 주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준비가 안 된 책임자이자 리더였다. 중간관리자 이상급 리더그룹 중에도 시간을 들여 공적 본분을 체득하며 훈련된 사람이 별로 없었으므로 이 개인의 한계가 완충될 새 없이 그대로 드러났다. 공유, 협의, 합의, 판단과 의사결정과 같은 업무의 사전 작업은 생략되기가 일쑤이고 있더라도 없는 것이 나았을 만큼 조직원 간 오해와 불신이 쌓였다. 랄라를 포함하여 이 조직에는 커뮤니케이션에 능통한 중간관리자도 별반 없는 것이었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무섭게 내달리는 기차에 올라타 그나마 대형사고를 면 하는 방법은 통증과 속도에 무감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두서 없이 이리저리 생각을 하다가 결국 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랄라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말을 쏟아냈다. 화를 다스리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깜냥도 안되는 인간이 역할놀이 한거지. 감당 안되니까 도망을 쳐! 나인 이런 사람 봤어요? 난 처음봐!”

“야반도주야 뭐야. 나는 매번 이런 결론이 너무 화가 나요. 나인은 안나요?”

“점잖기는 쥐뿔! 누가 그런 소리 하면 내가 쫓아다니면서 아니라고 할거야. 이건 그냥 비겁한거지. 그런 사람에게 무슨 연민이라도 느끼는 거야 뭐야. 왜 편 들어줘. 사람들은 참 속도 좋아”  


랄라는 실껏 말을 하고 나면 잠시 화가 삭혀지는 기분을 느꼈다. 랄라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나인에게 하고 또 했다. 치받아 올라오는 화를 긴급하게 진화하는 일이 최우선인 것처럼. 그럴 때마다 되려 말이 없어진 건 나인이었다. 그래서 랄라는 꼭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아졌다.


“소셜섹터 전체가 미션수행에 전력을 다해도 쉽지 않은 중하고 어려운 일인 건 맞고. 그래 뭐. 도와줄 생각들은 안하고 어디 잘하나 두고 보자 다들 팔짱 끼고 보고만 있었지만서도 그걸 모르고 맡은 것도 아니잖아요. 무슨 조직의 명운을 혼자 다 짊어진 것 마냥 구는 것도 꼴보기 싫었어요”  


입이라도 터진 것처럼 랄라는 나인만 보면 한참 말을 늘어놓았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이고 그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랄라의 말문이 막혔다. 꽉 막힌 속에 소화제 한 알을 밀어넣듯 깜짝 나타나는 효과도 반감되던 와중에 나인이 꺼낸 말 때문이었다. 이번엔 내 차례라는 듯 별다른 기대 없는 무심한 얼굴로 내뱉어진 그 말은 정해진 답이 질문형식으로 어떻게든 답을 내야 하는 상대의 무결성을 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범생 같은 랄라는 100점짜리 정답을 알고 있었음에도 쉬이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순간 랄라의 입은 굳게 닫혔다. 랄라는 또다시 후회를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먼 훗날까지도 이날을 되돌아 후회를 하고 또 할 것이었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오로지 '너' 라고 대답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커버사진: UnsplashIrham Setyaki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

☞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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