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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쓰는 사람 25화

현실과 공상 사이

#아무것도없는왕 #라울니에토구리디 #반달

by 수키
왕은 어떤 ‘무엇’을 보았을까?


잠을 자고 있는 듯한 왕의 표정. 모든 것이 점선으로 되어 있는 그림책. 오로지 왕 만이 진한 연필선으로 그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점선으로 되어 있는 세계에서 왕은 자신만의 특권을 누리 던 날, 있어서는 안 될 ‘무엇’을 발견한다. 왕 외에 어떠한 색도 없었던 그 세계는 이제 왕과 ‘무엇’이 선명한 형체로 눈에 띈다. 자신의 세계를 알 수 없는 이 ‘무엇’이 자신의 성을 점령할까 봐 왕은 초조하다. 두려움에 휩싸인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그 무엇은 사라졌고, 사라진 ‘무엇’을 향해 왕은 소리친다. “그만해!” 그리고 마주하게 된 ‘무엇’. 사라진 ‘무엇’의 자리에는 그전보다 더 크고 선명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왕이 ‘무엇’과 온 힘을 다해 싸울수록 ‘무엇’은 더 많은 ‘무엇’을 만들어 낸다. ‘무엇’에서부터 도망친 왕이 긴 잠을 자다가 깨어났을 때, 왕국에 퍼져있는 불안한 향기를 맡았고, 그 향기를 따라간 곳에는 ‘무엇’을 주변으로 다른 무수한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왕만이 존재하고 있던 그 세계에는 ‘무엇’과 ‘왕’이 함께 존재하게 된다. 왕은 ‘무엇’을 바라만 볼 뿐,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왕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고 하지만 입이 가려진 채 눈과 코만 보이는 왕의 얼굴에서 미소를 머금은 표정인지 알 수 없다. 왕은 무수히 많은 ‘무엇’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상이 평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다가 주어진 그 일상은 달콤한 휴식처럼 느껴지지만 계속 반복되는 그 평온은 점점 세상과 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한창 독서모임에 빠져들어서 점점 더 많은 독서모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성인모임, 어린이책을 보는 모임, 동네 책방에서 하는 모임, 일요일 저녁에 하는 모임, 줌으로 하는 모임. 처음 독서모임은 책을 읽을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면 두, 세 번씩 읽어서 모임에 참여했지만 지금은 한 번 보는 것도 벅차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듯하다. 어느 날, 밀리고 밀려서 다음날 발제를 해야 하는 책인데도 불과하고 급하게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책을 손에 잡았다. 한 시간을 읽고 있어도 글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모임이 좋은 걸까.


책이 좋아서, 그 책으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워서 시작된 독서 모임들이지만 모임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책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작 내가 있고 싶은 책은 책상에서 밀려나 책장에 꽂혀 버렸다. 그래서 정한 올해 나의 목표는 ‘지행합일’이었다. 내가 행동할 수 있는 만큼만 알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속도를 늦춰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기분에 취해 흥청망청 하기보다는 깊이 스며들 수 있는 시간을 갖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내가 삶에서 무리하게 액셀을 밟을 때 제동을 걸어주는 역할을 한다. 꿈을 꾸다 보면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질 때가 있다. 꿈은 꿈일 뿐이고 내가 살아있는 이 현실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꿈을 좇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탓하기만 한다. 내 현실이 여기인 것을 망각하고 환상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 나.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스스로를 점검한다. 책 속에 빠져서 정작 현실에서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다가 몸을 더 움직여서 세상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장애인식개선 독서 모임이 아닌 시민옹호활동가로, 어린이책 독서 모임이 아닌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교육봉사자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움직이니 속도가 맞춰진다. 현실이 보이니 그동안 회피했던 두려움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방법은 역시 부딪치는 게 최고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요즘, 일상은 더욱 바빠졌지만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다. 나는 여전히 현실이 아닌 공상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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