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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이의 대화와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그림책 《안녕, 돌멩이야》는 작은 것 하나에도 호기심을 품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아이는 끊임없이 돌멩이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이의 질문은 순수하다. 무엇이든 물어본다.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는지, 귀가 들리는지, 성격이 어떤지, 겨울잠을 자는지, 몸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그리고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돌봐주는 것을 좋아하는지. 돌에게 다가가는 아이의 모습에서 아무런 편견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나도 돌멩이에게 질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돌멩이는 그저 돌멩이일 뿐 무슨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의 질문은 호기심 앞에서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다. 순간의 반짝이는 호기심을 품고 사는 아이. 그런 아이의 모습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돌멩이는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자신을 쓰다듬어 주고, 만져 달라고 한다. 그리고 던졌다 주우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한다. 부서지는 것은 겁나지만 던져지기를 바라는 돌멩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던진다는 것은 무엇일지,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지 생각해 봤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배움’이었다. 나에게 배움은 던져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멩이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시작한 배움은 그 끝을 모르고 여전히 달리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나는 왜 배우는 걸 좋아할까?’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배울 때 내가 가장 용감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그의 저서인《몰입: Flow》에서 쾌락과 즐거움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쾌락은 단순히 지금 그 순간의 기쁨을 나타내는 감정인 것에 반해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에는 성장과 변화가 함께 포함된다고 말한다. 어른이 되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을 그만두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학업이 자신에게 성장과 변화를 주는 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졸업 후에는 담을 쌓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어릴 적 학교에서 느꼈던 배움은 즐겁지 않았다. 진도에 맞춰 빠르게 넘어가야 하는 교과서에서는 내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공부를 하기 일쑤였고, 벼락치기로 치른 시험은 결과를 위한 공부일 뿐 나에게 그 어떤 의미로 다가오지 못했다. 그런 내가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곳에 나를 던진 용기 덕분이 아닐까.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 누군가가 설정해 준 목적이 아닌 스스로가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목적을 세우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아이가 나에게 어른이 되면 무엇이 좋냐고 물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 내가 원하는 걸 마음껏 배울 수 있어.”라고 말했다. 아이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 공부가 절대 재밌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푹 빠지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아이는 어려서부터 기차에 푹 빠진 아이가 걱정되어 아이의 미술 선생님께 고민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은 “아이가 스스로 질릴 때까지 계속하게 두세요.”라고 말했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믿고 나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실컷 좋아할 수 있게 도왔다. 우리는 자주 기차를 보러 갔고, 기차 그림을 그리고, 기차 노래를 부르고, 여행을 할 때면 기차를 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열 살이 된 아이가 얼마 전 더 이상 기차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내 삶에서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성장하는 동안 주변을 너무 의식해 버리는 탓에 그 감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초등학교 시절 조별 숙제를 하면서 우리 조의 이름을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라는 의미에서 ‘돌멩이’로 지었다. 무엇이든 되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하기 위해서는 한 자리에서 웅크리고 고민하기보다는 어디에든 던져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단, 생존할 수 있는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