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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쓰는 사람 24화

지운 기억

#기억의틈 #세실리아루이스 #바다는기다란섬

by 수키
내가 기억하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


나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많이 없다. 어쩌면 나는 기억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책 《기억의 틈》에서 잃어버린 말을 찾아 헤매고 있는 나타샤가 책을 밟고 서 있는 아슬아슬 한 모습이 마치 기억을 찾으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인 것 같아 안타깝다. 단편적인 기억을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떻게든 이어 보려 하지만 억지로 이어진 꼬리를 금방 잘라 버리는 기억들. 내가 생각해 낸 기억이 정말 내 기억인지, 내가 만들어낸 기억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걸 깨달은 순간 기억이란 참 우습구나 생각이 든다. 이미 지운 기억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 초등학교 때 언니와의 등굣길에서 화단에 있는 지렁이를 발견했고, 언니는 나에게 지렁이가 크면 뱀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언니의 그 말을 믿었고, 무척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학교 수업에서 지렁이에 대해 배우던 날, 나는 친구에게 언니가 해준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친구는 손을 번쩍 들고는 선생님한테 내가 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물었다. 선생님은 거짓말이라고 했고, 나는 창피하고 당황스러웠고, 그날의 일을 내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지우는 연습을 했다. 머릿속에 내가 창피했던 일을 적고, 지우개를 만들어 그 글자들을 쓱쓱 지워나갔다. 효과는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을 곧 잘 잊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었다. 점점 나는 머리로 외우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렸을 때 가족들과 무얼 했는지, 친구들과 어떤 놀이를 했는지, 학교는 어떻게 다녔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지만 사는 데 불편함이 있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나간 과거이고, 지나간 일을 기억한다고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나의 착각이었다.


동네 책방에서 그림책을 읽다가 글을 쓸 기회가 생겼다. 글은 작가들이나 쓰는 거라고,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책방 선생님이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글쓰기는 벽을 만났다. 나의 어릴 적 이야기를 소재로 동시와 동화를 쓰는 시간이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억이 남아있지만 그때 내가 가족과, 친구와 나누었던 말들과 감정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원망했다. 부끄러운 기억을 그대로 두었더라면 지금의 내 글을 좀 더 풍성하게 꾸밀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의 기억은 보일 듯 말 듯 뿌연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그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자려고 누웠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어렸을 때의 기억이 번개가 번쩍이듯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교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고아원을 방문한 것, 그곳에서 아직 초등학생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한 것, 고아원의 잡일을 도와준 것, 그리고 그날 고아원 선생님이 한 말.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잊고 살았던 기억이 튀어나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어서 생각했다. 그날 고아원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었더라. 생각났다. “아이들에게 너무 잘해주지 마세요. 어차피 봉사 시간만 채우고 다시 안 올 거잖아요. 너무 잘해주면 남겨진 아이들이 힘들어해요.” 불현듯 나타난 이 기억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또 그때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서 기억에서 지웠나 보다.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지만 사람들과 그림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잊고 살았던 무언가가 섬광처럼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오래 이어지지 못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해서 떠오른 잔상들을 천천히 글로 옮긴다. 어쩌면 나도 그림책 속의 여러 사람들처럼 기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만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는다. 만약 내가 기억력이 좋았다면 그 기억이 내 눈앞을 가려 더 넓게 생각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머리에 새겨지지 않는 기억은 글에 새겨 넣으면 되지 않느냐고 위로한다. 그리고 그걸로 제 삶의 구실을 다 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기억의 틈을 채우려 바둥거리지 않기로 했다. 지워진 기억의 틈이 삶의 바람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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