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일
식탁에 앉아 밥 먹는 아이들의 조물거리는 입을 가만히 바라본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먹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면 사랑이 식은 거라던데, 아이들의 번들거리는 입술은 사랑스럽기만 하다.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 나는 지금 확실하게 찐한 사랑을 하고 있다.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다. 뉴스는 매일 같이 가장 극심한 불황을 전하고, 기후 위기로 인류가 멸망할 거라 하고, 핵전쟁이 그 끝을 더 앞당길지도 모른다고 한다.
어두운 미래를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미덕처럼 느껴진다. 험한 세상에 굳이 자식을 태어나게 해 고생을 시키느니 차라리 낳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동,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제 밥그릇은 다 가지고 태어난다”는 무책임한 말로 출산을 권하기에는, 내가 겪고 있는 육아의 터널이 너무 길고 고되다. 그래서 나는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출산을 권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 아이들에게 조차.
직접적으로 낳지 말라고는 못한다. 나를 낳아 키우는 사람이 아이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니 낳지 말라고 하는 건 슬프고 폭력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신 조심스레 너희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굳이 낳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에둘러 표현할 뿐이다.
그렇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자식을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지나온 이 길고 긴 터널을 그들이 굳이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조금 더 가볍게, 조금 더 자유롭게, 온 세상을 누비며 살았으면 한다. 진심으로 평안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이렇게 온전하게 누군가의 삶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다면 이런 감정을 알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나는 늘 내 몸만 편하면, 내 배만 부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남이 사는 일에 관심이 없는, 개인적이다 못해 이기적인 사람 말이다. 그런 내가 아이들의 삶이 평안하길 간절히 바란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세상을 낳는 일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
내가 낳은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져야 그들이 평안할 거라 생각하는 일.
그래서 뭐라도 좀 해보려는 그런 방식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자식을 낳지 않길 바라는 것은 괜찮을까. 그들이 이런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도 평안하면 그만이라는 내 사랑은 진짜일까.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힘든 것은 싫지만, 동시에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쉽다. 어차피 결정권은 내게 없으면서도 지레 몇 년을 앞질러 이런 걱정을 대신하고 있다. 이런 바보 같은 엄마가 바로 나다.
출산율이 낮아지는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무심하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생물학적으로 인류가 너무 많아져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소멸된다 해도 지구 차원에서 무슨 상관이겠느냐. 당장 사는 게 벅찬데 어떻게 아이를 낳으라는 말이냐며, 탁상공론에 빠진 정치인과 공무원만 탓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들이 내놓는 대책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나를 똑 닮은 아이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이 자식을 낳고 싶어 하지 않는 세상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소망조차 점점 줄어드는 세상은 어떻게 해도 좋아질 수 없겠구나.
퍼뜩 정신이 들고 세상이 안쓰러워진다.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그 안에서 살아갈 아이들이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
사랑이 대물림되지 않는 세상.
눈앞이 캄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