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일
‘연예인 병’이라는 말이 있다.
갑자기 인기를 얻은 연예인이 안하무인 해지거나 지나치게 자기 내면에만 몰두할 때 붙는 이름이다. 나는 요즘 ‘아티스트 병’에 걸린 건 아닌지 돌아본다. 칭찬 몇 마디와 개인전 한 번에 도취하여, 대단한 예술가라도 된 듯 착각하며 지낸 것은 아닐까. 혹시 불치병이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
그 자각은 우연히 읽은 SNS 글에서 비롯되었다. 꼭 내가 쓴 듯한 문장을 마주하자 얼굴이 화끈거렸고, 아티스트 병의 민낯을 거울처럼 비추어 보게 된 것이다.
글쓴이는 아마도 정통 미술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나 보다. 그는 아트페어와 인사동 갤러리에 전시된 꽃과 나비 그림을 거친 언어로 비난했다. ‘문화센터에서 꽃 그리는 거나 배워서 어깨에 뽕 잔뜩 넣고 아트페어와 갤러리를 휘젓는 사람들 때문에 미술계 물이 다 흐려진다’면서 거침없이 비난을 쏟아부었다.
처음에는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그린 예쁜 그림들이 많이 팔리고, 반면 작가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신진 작가의 작품들은 주목받지 못하는 미술 시장이 아쉬웠다.
그러다가 이내 뭐 이렇게까지 비난할 일인가 싶어졌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겠지, 대중이 꽃과 나비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겠나. 아쉽긴 하지만 험한 말로 불평하고 험담할 일은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해 봤다.
그런데 그때, 사실 어조만 다를 뿐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폭발할 것 같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해 누가 그 글을 볼까 황급히 스마트폰의 화면을 꺼버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역시 그렇게 말할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파는 입장에서, 생활에 여유 있는 사람들이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작가 대접을 받는 일이 못마땅했을지 모른다. 자신은 한 작품 한 작품에 온 힘을 쏟아붓는데 세상은 냉담하다면, 절망과 분노가 터져 나올 수도 있다. 얼마나 간절하면 그런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을까.
사실 나도 꽃과 나비 그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저 ‘예쁘기만 한’ 소재라 치부했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그런 그림을 그리겠다고 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고, 지인들이 전시장에서 그에 감탄하면 속으로 혀를 찼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말이다. 정작 나는 뭐 그리 대단한 그림을 그렸다고.
꽃과 나비라도 제대로 그려보고 혀를 끌끌 찼어야 했다. 아니, ‘제대로 그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제대로 그렸다고 해서 남의 그림을 깎아내릴 권리가 생기는 걸까.
예쁜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꽃과 나비는 세상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더 아름답게 만든다. 그리는 사람도 감상하는 사람도 행복하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작품에 반드시 특별한 의미가 담겨야 한다는 집착은 예술을 쓸데없이 어렵게 만든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마음을 전할 수 없는 예술을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취미 미술은 ‘함께 그리고 즐기는 것’에 의미가 있고, 순수 미술은 ‘작가의 관점과 의도’에 무게를 둔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다를 뿐이다. 그런데 나는 공부 조금 했다고 스스로를 고급 예술가인 양 착각하며, 꽃과 나비 그림을 저급한 것으로 치부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즐기는 길은 차이를 인정하고 편견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 작업이다. 남을 비난하며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보다, 그 에너지를 작품으로 승화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나 역시 그래야 한다. SNS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붓으로 대답하는 것이 옳다.
내 아티스트 병은 이제 조금씩 치유되고 있을까. 지난 수업에서 회원들에게 지나치게 ‘의미 있는 그림’을 강요했던 게 미안해진다. 취미면 어떤가, 어깨에 힘 좀 주면 어떤가. 그림은 그냥 예뻐도 된다. 즐길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나 잘해야 한다. 무엇이라도 그려내며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생산적인가. 세상 탓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 정신 차리자. 뭐라도 좀 그려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