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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만들기의 가치

세상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일

by 숟가락

아마도 어버이날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린 나는 빨간 색종이를 가지고 놀다 우연히 뭉친 종이의 모양이 꽃처럼 예쁘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접은 것도 아니고, 그냥 구겨서 뭉친 것이었지만 내 눈에는 너무나 예쁜 꽃 두 송이였다.


엄마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엄마 아빠가 늦잠을 자고 있는 안방에 몰래 들어가 그 종이꽃을 화장대 거울에 붙여두었다. 일어나서 보면 엄마가 좋아하시겠지, 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금세 무너졌다. 엄마는 짜증 섞인 얼굴로 거울에 붙은 종이꽃을 떼어내며 이게 뭐냐고 화를 내셨다. 엄마도 피곤했을 테고, 사는 게 버거웠을 테고, 아이가 거울에 붙인 쓰레기가 거슬렸을 수도 있다.


어른이 된 지금이야 이해하지만, 어린 날의 나에게는 커다란 슬픔이었다. 별스럽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방의 풍경, 거울에 붙어있던 빨간 종이꽃 두 송이, 거칠게 떼어내던 엄마의 손을 그대로 기억한다.

letter-1390586_1280.jpg 이미지 출처: Pixabay


그래서인지 우리 아이들이 어린 시절 만든 작품을 볼 때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소중했다. 끄적인 낙서 한 장, 아무렇게나 뭉친 클레이 조각도 소중해서 잘 버리지 못했다. 마냥 쌓아놓을 수 없으니 버티다 버티다 사진을 찍어두고, 아이에게 버려도 되겠냐고 물어보고 나서 버리곤 했다. 막상 아이는 쿨하게 버리라고 말하는데 내 마음이 그걸 쉽게 보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내 아이의 작품만 그렇지도 않았다. 도서관 책놀이 수업에서 아이들이 만든 결과물도 하나하나 정말 예뻤다. 고사리손으로 이렇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혹시나 집에 가져가서 아이들이 나와 같은 상처를 받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도서관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의 대부분은 내 걱정과는 달랐다. 교실 문을 나서는 아이들은 작품을 들고 부모의 품에 안기며 작품 설명을 신나게 늘어놓는다. 그러면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으며, 귀 기울이고 칭찬해 주는 부모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마음이 드는 순간이 많았다.

kids-2985782_1280.jpg 이미지 출처: Pixabay

그래도 간혹, 아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이거 가져가봤자 엄마가 바로 버려요.'라는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그럴 때면 내가 더 속상해지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덤덤해 보였다. 늘 버리는 일에 익숙하니 그리 상처가 되지도 않았던 걸까. 그래서 어떻게든 빨리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조금이라도 더 예쁘고, 쓸모 있어 보이게 만들기 위해 예산을 초과해 내 돈을 털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아이들의 손으로 하는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다. 부모님들 눈에는 여전히 ‘쓸모없는 만들기’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만들기’는 왜 하는 걸까? 독후활동 그런 거 왜 하느냐는 사람들이 있다. 책은 그냥 읽으면 되지 왜 그런 것까지 구태여 하느냐는 말이다. 쓰레기가 될 것만 만들어내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읽고 나서 어땠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책 속에 나온 지식을 구태여 다시 복습하고, 억지로 독후활동을 하는 일은 아이들이 책을 싫어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 가끔씩,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볍게 하는 만들기 활동은 아이들의 삶을 아주 조금, 하지만 분명히 풍요롭게 만든다. 쓸모없는 만들기 작품들은 얼마 못 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만드는 동안 집중하느라 삐죽 나온 입, 색연필과 가위를 꼭 쥔 고사리손의 감각, 알록달록한 색과 상상의 나래는 모두 사라지지 않고 아이들의 가슴 깊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삶의 어느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되거나, 다친 상처를 어루만지는 연고가 되거나, 삶을 더 건강하게 지탱해 주는 뿌리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신체 예술을 하는 이건용 작가는 동시대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쓸모없음의 극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자신의 예술 세계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미대를 나오고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대학에서 교수까지 하고 있는 이건용 작가에게 어머님은 그림을 그만두고 의사가 되라는 말씀을 끊임없이 하셨다고 한다. 처자식들의 생계도 자신이 해결해 줄 테니 공부해서 의사가 돼라 하시는 어머님에게 왜 의사를 해야 하느냐고 작가는 물었다.


어머님께서는 의사는 '쓸모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단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는 자신은 쓸모없는 일을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작가는 그때부터 아예 자신의 예술관을 '쓸모없음의 극한'으로 삼아 버렸다.


그의 작품은 아무런 의도를 갖지 않고 신체의 움직임 그대로를 담은 드로잉과 쓸모를 찾을 수 없는 설치작품, 전혀 효율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이루어진 퍼포먼스가 대부분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경제적이고, 아름답다는 세상의 가치판단 기준에서 본다면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참 쓸모가 없다.


하지만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 나와 타인의 경계, 세계와 다른 세계의 경계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하는 그의 작품들은 쓸모가 없어서 더 가치 있다. 그런 사유들이 모여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닐까?

family-591579_1280.jpg 이미지 출처: Pixabay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하는 여행은 의미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좋은 곳에 가서 좋은 경험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여도 결국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는 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은 되어야 기억을 하니 그때부터 여행을 다니라고들 한다. 그런데 사실 초등학교 고학년은 사춘기다. 사춘기 자녀와의 여행도 그 나름대로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거라고 설명해도, 눈감고 귀 닫는 사춘기에게는 무의미한 일일 뿐이니까.


아이들이 어릴 때 하는 여행도 의미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믿는다. 기억하고 말하지는 않지만 가슴 깊은 곳에 그때의 공기, 색, 맛, 촉감이 모두 남아 언젠가 불현듯 떠오를 것이라고. 그러니 어려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무시하지 말고, 더 자주 여행을 떠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주변 아기 엄마들에게 종종 권한다. 쓸모없는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버려지고 잊히더라도 그날의 감각과 기억은 가슴 깊숙이 남아 삶의 순간들을 더 풍요롭게 가꿔줄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 필요해서 그에 따른 기술이 발명되었다는 말인데, 사실 알고 보면 발명은 우연한 발견일 때가 더 많다. 발명은 우연의 산물이고,

우연은 쓸모없는 일의 어느 지점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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