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일
낯선 곳에서의 첫날밤.
여기는 집이 아닌 진해다.
진해는 나와 남편이 신혼생활을 했던 곳이다. 작은 원룸, 자전거 두 대, 집 앞에 새로 생긴 도서관, 여름에만 문을 열던 냉면 맛집, 거제도 가는 카페리, 안민고개에서 나눠 먹던 토스트와 커피, 바다 경치가 아름다운 레스토랑. 우리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 내가 떠나온 여러 지역 중 한 곳이었다. 다시 돌아갈 일은 딱히 없을 줄 알았다. 어쩌다 보니 돌아와 있다.
오늘부터 진해 행암문예마루에서 입주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와서 보니 남편과 자주 찾았던 기찻길이 있던 항구였다. 심지어 함께 다정한 저녁 식사를 했던 바다 경치가 아름다운 그 레스토랑이 지금의 행암문예마루였다.
사실 요즘은 많이 막막했다. 그림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고,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할지도 몰랐다. 서울에 있는 동료 작가들이 잘 나가는 동안 나는 이 촌구석에서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었다. 그럼 닥치고 그림이라도 그려야 하는데 손은 놀리고 방황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넋 놓고 있었다.
요즘은 뭘 넣어도 다 떨어지는 때였다. 어디에 원서를 내고, 작품을 내도 늘 떨어지는 때. 무엇을 해도 다 되는 때도 있지만 아무리 해도 다 안 되는 때도 있으니까. 그런 때인가 보다 생각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의 인생 곡선은 파동이라고 생각한다. 상승곡선과 하강곡선이 반복되는 파동 같은 인생. 이왕이면 우상향이면 좋겠지만 간혹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법이겠거니. 요즘은 하강곡선이었다. 그래도 끝도 없이 계속 안 되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언젠가 곧 상승곡선을 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바닥을 치고 상승곡선을 타는 때가 언제 찾아올지는 알 수 없으니까. 겉으로는 괜찮은 척해도 안 괜찮았다.
지쳐가고 있을 때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던 이곳, 진해가 고마운 기회를 주었다. 우연히 입주 작가 공고문을 발견하고 급하게 원서를 썼다. 다행히 좋은 결과로 이어져 바다 경치가 아름다운 이 건물 안에 작은 내 방이 하나 생겼다. 아직은 낯선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어쩌면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가 상승곡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계속 떨어지기만 하니 될까 싶었지만, 어이없게도 되는 일. 아무도 나를 찾지 않나 싶어 우울하던 차에 강의 문의도 조금씩 들어오고 있다. 이제 내가 부지런해지기만 하는 일이 남았다.
쉽지는 않다. 살면서 그렇게 바빠 본 적이 없다. 대체로 시간 계획을 여유 있게 짜는 편이기에 뭔가를 서두르면서 하지 않았는데, 이제부터 1년은 조금 빡빡하게 시간을 써야 할 것 같다. 진주, 사천, 진해를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강의도 해야 하고,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내 작품도 해야 한다. 하지만 괜찮다. 이렇게 살아보는 때도 있어야지.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았다.
막상 입주하고서는 주눅이 조금 든다.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초보 작가인 것 같다.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좋은 작품을 많이 한 작가님이 옆방에서 자고 있다. 이미 꽤 인지도가 있어 보이는 웹소설 작가님도 함께 한다. 지난번 입주 작가들은 홍대 출신이었다고 한다.
디지털 대학을 나온 내가 이런데 비비고 붙어 있어도 되나 자신감이 조금 떨어지려고 하지만, 괜찮다. 아직 하강 곡선의 밑바닥 중인 걸로 치자. 이제 상승 곡선 타겠지. 언젠가 다시 또 하강 곡선을 만나겠지만 그것도 괜찮다. 세상일이 어떻게 다 내 마음대로만 되겠어.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생 곡선의 파도 위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만 해도 잘하는 거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