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일
‘평범하게 살고 싶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고 싶냐”라고 물으면 가장 흔하게 돌아오는 대답이다.
남들처럼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고,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편안한 노후를 맞는 삶. 그것이 평범한 삶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꿈까지 꿔야 할까? 이루기 어렵기에 꿈을 꾸는 삶이, 왜 ‘평범’이라 불리는 걸까.
지극히 평범하고 싶은 나는 늘 내가 평범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둘째 아이를 갖기 전, 잠시 미술심리상담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때 그 공부를 한 진짜 목적은 자격증이 아니라 내가 정신병자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심리검사를 직접 나에게 해보며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많이 안도했다. 조금 우울한 감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심각한 치료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중간에 몸이 아파 과정을 끝까지 이수하지는 못했지만, 그 경험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서전을 쓰는 이야기이다.
평범한 사람이 쓰는 평범한 삶에 대한 자서전을 시작한 주인공은 글을 쓰면서 자신 안에 여러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강인한 아버지, 나약한 어머니, 억척이, 우울한 사람, 시인, 영웅 등. 각기 다른 자아들이 뒤섞이며 평범했던 인생은 평범하지 않은 인생으로 변해간다. 여러 개의 자아가 벌이는 머릿속 논쟁에 주인공은 힘들어하지만 결국 그 모든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런 다양한 자아를 요즘은 ‘부캐’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캐는 ‘부 캐릭터’의 줄임말로, 본래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모습을 뜻한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유재석이 유행시킨 표현이다.
프로그램 안에서 그는 유산슬, 지미유, 유두래곤 등 여러 부캐를 가지며 본래의 자신인 ‘유재석’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우리를 웃게 한다. 그 프로그램 밖에서도 그는 여러 가지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런닝맨’에서는 장난꾸러기, ‘유퀴즈’에서는 사려 깊은 공감자, ‘핑계고’에서는 말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수다쟁이가 된다. 텔레비전 화면 밖에서도 아버지, 남편, 아들, 친구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여러 개의 자아가 있다.
그리고 그 자아들 사이의 감정 기복 편차가 매우 심한 편이다.
독서모임에서는 나서서 말하고, 리드하지만, 친정에서는 과묵하고 어른스럽다. 매사에 자신 있는 것처럼 굴다가도, 잘 모르는 분야가 나오면 쉽게 자신감을 잃고 도망가기 바쁘다. 계산적이고 차가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작은 슬픔에 울컥하거나 굴러가는 나뭇잎 하나에도 웃는다.
여러 자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평범한 인생》을 읽으며 다시 위로를 얻었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며, 가능성이기만 했던 것은 현실이 된다. 나를 제한하는 이 자아가 내가 아니면 아닐수록 나는 더 많은 존재가 된다.”
주인공은 여러 자아 모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이 특별함이 아닌 진정한 평범한 인생이라고 정의한다.
부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라 다행이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는 말이 두려웠던 날들을 지나, 여러 자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모두는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스스로를 하나의 정답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가야겠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특별하지만 평범한 인생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