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일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
이런 칭찬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요즘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 삼프로의 ‘과학을 보다’에서는 이 말이 자주 나온다. 문과 남자 정프로가 사회를 보고, 과학자 네 명이 패널로 나와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이다. 정프로가 질문을 던지면 과학자들이 “와!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네요!”라고 감탄하며 이야기를 풀어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정프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핵심을 짚었다며 으스대는데, 그 모습이 웃음 포인트다.
오늘도 방송을 보며 키득거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런 칭찬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또 누군가에게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해 준 적이 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답을 할 생각만 했지 그 질문 자체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질문하는 데도 용기가 많이 필요했다. 좋은 말로 답을 들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칫하면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듣거나, 심지어 혼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좋게 답을 듣더라도 상대가 속으로는 그것도 모르냐며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궁금한 게 있어도 참거나 혼자 찾아보는 게 대부분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을 때에야 큰 용기를 내 물어보곤 했다.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 오래고, 그만큼 낯도 많이 두꺼워져 예전보다는 훨씬 편하게 질문을 한다. 혼자 답을 찾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시간도 더 오래 걸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겨우 깨달았다.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과정이 유연하게 이루어지면, 질문하는 사람과 답하는 사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혼자 끙끙대며 답을 찾는 과정도 의미 있지만, 상호작용을 통한 이해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질문하면, 되도록 친절하게 답하거나, 몰라도 함께 답을 찾는 과정을 즐기려 노력했다.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는 나의 태도는 백 점 만점은 아니어도 한 75점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고 자만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바로, ‘정말 좋은 질문’이라는 칭찬이다. 궁금한 게 있고, 그것을 알고 싶어 하고, 그래서 질문하는 용기를 가진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왜 한 번도 아이들의 질문에 ‘정말 좋은 질문’이라는 칭찬을 하지 않았을까? 질문 자체에 대한 칭찬이 빠졌으므로 내 태도 점수는 50점으로 수정해야겠다.
궁금한 게 하나도 없는 삶은 어떨까? 모든 것을 다 알아서 궁금한 게 없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세상 일의 대부분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고, 알고 있는 것은 그저 티끌만큼이다. 그러니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삶, 질문을 하지 않는 삶을 생각해 보니 갑갑해진다. 세상 사는 일에 무슨 재미가 있을까?
우리가 누리고 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사소하지만 좋은 질문’에서부터 출발했다. 해는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질까? 사과는 왜 땅으로 떨어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왜 태어나고 죽는 걸까? 사소한 질문이 좋은 질문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그것을 탐구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발전해 왔다. 그러니 좋은 질문에는 반드시 칭찬을 해주어야 마땅하다.
과학자들은 질문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자라온 환경은 나와 달랐을까? 어쩌면 그들도 처음엔 나처럼 질문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라는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다. 그게 참 부럽다.
마흔을 넘기면 자기 얼굴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고 하던가.
이제는 질문에 대한 태도도 환경 탓만 할 수 없다.
그 책임도 결국 나에게 있다. 그러니 연습이 필요하다.
“정말 좋은 질문이야.”
아이들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질문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기 위한, 나의 작은 연습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