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일
"사랑합니다. 고객님”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요? 에이, 아니잖아요. 전화를 받자마자 사랑한다는 거짓말부터 하는 당신을 어떻게 믿고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 진짜 내 개인 정보를 당신에게 말해도 괜찮은 거 맞나요?
사랑한다는 말이 쉽지 않던 때가 있었다.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다. 불과 십여 년 전,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 말은 지닌 무게가 너무 무거워 쉽게 뱉기 힘든 말이었다. 사랑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고, 가족에게도 연인에게도 큰마음을 먹고 건네는 소중한 말이었다.
그런 말이 어쩌다 이렇게 가벼워졌을까? 그놈의 '사랑합니다, 고객님' 때문이 아닌가 싶어 콜센터를 운영하는 대기업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어진다.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정도면 충분할 인사를 굳이 '사랑합니다'까지 하게 했을까. 그래야 고객에 대한 진심이 전달된다고 믿는 건가? 진심이 있긴 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만큼 진실되지 않은 모습이 또 어디 있냐고. 제발 날 사랑한다고 하지 말아요, 콜센터 직원님.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어원을 따지자는 건 아니다. 그저 어제 책놀이 수업 아이들과 함께 읽은 그림책이 생각나서 그렇다. 그 몽글몽글하고 예쁜 말이 어떻게 생겨나고 전해졌는지를 아름답게 이야기해 주는 그림책을 떠올리다 보니, 흔하디 흔한 인사말이 되어버린 요즘이 참 아쉽고, 그 말의 운명이 안쓰러워진다.
《별에게 전해줘》는 어느 해파리와 꼬리별의 사랑 이야기이다. 아직 지구에 생명이 다양하지 않던 시절, 외로이 바다를 떠다니던 해파리에게 예쁜 달님 같다고 해준 꼬리별, 몇 백만 년을 홀로 우주를 떠돌던 꼬리별에게 당당하고 멋지다고 해준 해파리. 둘은 단 하룻밤의 만남이지만 서로의 세계와 마음을 열어 보여준다. 날이 밝아오자 별님은 희미해지고, 언제 또 만날 수 있냐는 해파리의 물음에 몇 백만 년 후쯤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해파리는 못내 별님에게 하지 못한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할 수가 없었어요. 온몸이 눈물주머니가 되어 꿀렁꿀렁해졌거든요. 한마디만 해도 퐁 터져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죠.’
해파리는 전하지 못한 그 말을 다시 만나게 되면 꼭 해주리라 다짐하며 별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몇 백만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도 모른 채. 죽기 전 해파리는 어린 해파리에게 그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아이는 또 손주 해파리에게, 다시 또 그 손주에게 그 말을 전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해파리 중 일부는 모습이 달라져 누구는 개구리가 되고, 누구는 쥐가 되고, 새가 되고, 또 어떤 해파리는 인간이 된다. 말은 계속 전해 내려갔지만,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 말을 누구에게 전해야 할지는 잊히고 말았다.
‘전할 상대를 잃은 그 말. 이제는 많은 사람이 저마다 많은 상대에게 그 말을 하고 있답니다. (중략) 꼬리별이 은빛 꼬리를 휘날리며 하늘을 가로지를 때면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세상 곳곳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사랑해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책장을 덮으려다 메아리처럼 내 가슴을 울리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도 사라져 버릴까 봐 머뭇거리게 된다. 말하고 나면 가슴이 꿀렁꿀렁해져 펑 터져버릴 것 같이 소중한 말 ‘사랑해요’. 해파리가 별님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그 말이 수백만 년을 흘러 우리의 입으로, 마침내 별에게 도달한 것이다.
이런 예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사랑해요'라는 말이 가진 진심은 이렇게 쓰일 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을 때면 '사랑해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라는 부분은 나도 모르게 소곤소곤 말하게 된다. 아주 소중한 말이니까 날아가지 않게 잘 잡아서 가슴에 담으라고. 얼마나 예쁜 말이니, 얘들아. 너희처럼 예쁜 말이야.
사랑한다는 말이 아무렇게나 쓰이는 요즘이 아쉽다.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라 그런 걸까?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렇게 더 외롭고 더 쓸쓸할까?
제발 나를 사랑하는 고객님이라고 말하지 말아 줬으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아무 데나 쓰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