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물 사전
‘롤 모델이 있나요?’ 도 아니라 ‘롤 모델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다.
최근 면접에서도 결국 그 질문을 받았다. 뻔히 나올 만한 질문인데도 왜 제대로 답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저 “롤 모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들은 있지만요.” 하고 짧게 말하고 말았다. 대답을 끝내자마자 아차 싶었다. 성의 없어 보일 수 있겠구나. 내가 심사위원이라도 실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없는 롤 모델을 꾸며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오늘은 그 질문에 대한 성의 있는 답을 글로라도 남겨본다.
롤 모델이란 무엇일까. 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롤 모델 (role model): 자기가 해야 할 일이나 임무에서 본받을 만하거나 모범이 되는 대상. — 네이버 우리말샘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본받으며 자신을 성장시킨다. 그렇지만 나는 남을 따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롤 모델이라는 단어는 마치 ‘모범답안’이라는 말처럼 느껴진다. 삶이 수학 문제도 아닌데 어떻게 모범답안이 있을까. 날 때부터 놓인 환경과 경험, 현재 처한 상황이 다 다르기에 다른 사람의 삶을 모범 답안으로 여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명을 주는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삶 전체를 본받을 롤 모델은 없지만, 작품을 통해 순간순간 나를 흔드는 작가들은 있다. 요즘 특히 마음을 두고 있는 예술가 네 명을 소개해보려 한다.
먼저 두 명의 글 작가. 김영민 작가와 은유 작가다.
김영민 작가는 정치사상연구자이자 교수다. 학문적인 저술도 많지만 나는 그가 쓰는 에세이를 참 재미있게 읽는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같은 책이 그렇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다. 잘 쥔 초밥처럼 신선하고 깔끔하다. 비유는 절묘하고, 문장은 세련됐다. 내 글이 그처럼 지적이면서도 재치 있기를 바란다.
은유 작가의 글은 그와 다르다. 날카롭지도, 유머러스하지도 않다. 대신 무척 솔직하다. 껍데기가 없는 글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같은 글쓰기 책,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같은 르포에서 그는 여성으로서, 엄마로서의 자신을 지우지 않고 세상과 사람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다른 이들도 사랑의 시선으로 보게 된 그의 글은 담요 같이 따스하고, 달걀찜처럼 부드럽다.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 안의 차가운 심장도 따스하게 데워진다.
두 작가의 스타일은 많이 달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결도 가지고 있다. 김영민 작가에게도 솔직함과 따뜻함이, 은유 작가에게도 세상의 어두움에 눈감지 않는 날카로움이 존재한다. 읽는 사람들에게 솔직하면서, 동시에 배려하는 마음을 담은 작가들이다. 닮고 싶은 글쓰기이다. 글을 쓰고 퇴고할 때마다 이들처럼 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주 곱씹게 된다.
다음은 시각예술가 두 명. 이건용 작가와 이성자 작가다.
이건용은 퍼포먼스와 설치미술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대표작 중 하나인 ‘달팽이 걸음’은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흔적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이내 뒤따르는 발자국이 그것을 지워버리는 행위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예술이 추구하는 방향을 ‘쓸모없음의 극한’이라고 말했다.
쓸모없음을 이야기하는 그 철학에도 공감하지만, 무엇보다 배울 점은 태도다. 그는 고령에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늘 다른 장소에서 다른 형식의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잘 알게 된 나는 나이라는 숫자 앞에서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이 나이에는 조금 더 생산적이고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건 젊은이들이나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이건용을 비롯한 노(老)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보며 용기를 얻게 된다.
늦은 나이는 없다.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나는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성자 작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추상화 가다. 이혼, 아이들과의 이별, 혈혈단신으로 떠난 프랑스 유학길. 그의 삶은 한 편의 영화다. 그는 파란만장했던 삶의 굴곡으로 주목받는 경우기 많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감동한 지점은 낯선 프랑스에서 스스로 삶과 예술을 개척해 나간 그 태도다.
프랑스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곤궁 속에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흘리는 땀의 가치를 아는 그의 판화 작품을 더욱 사랑한다. 아이, 어머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자아와 우주에 대한 탐구를 펼친 생의 마지막 작품들을 보면서 내 마지막 작품들도 그런 지경에 도달할 수 있기를 꿈꾼다.
언젠가 그처럼 한계를 넘어선 사유를 할 수 있기를.
1942년생인 이건용 작가는 지금도 작품 활동 중이다. 1918년생인 이성자 작가는 200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처럼 오래오래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 그래서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답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원대한 목표는 없습니다. 그저 살아있는 동안 오래오래 그리고, 쓰며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세상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곳에 지원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이유도 결국 그것입니다. 오래오래 하는 사람. 제 목표는 그것입니다.”
롤 모델은 없어도 된다. 다만 세상과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 오래오래 하려면 말이다. 나만의 모범답안은 없지만, 이 작가들의 삶과 작품 속에서 예시답안을 얻는다. 포기하지 않고 오래오래 이어가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길을 묻는다.
그래서 오늘도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는 말이 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 글을 일단 써본다.
오래 쓰려면 오늘도 써야 하니까.
그래야 내일 다시 쓸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