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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 키울 때 힘들었어?

세상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일

by 숟가락

얼마 전 서평을 쓰다 둘째 아이에게 읽어준 적이 있다. 그 안에 ‘내 새끼 하나도 집에서 보기 힘들어 보내는 어린이집’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재미있게 듣던 아이가 다 듣고 난 뒤, 그 부분을 콕 집어 물었다.


“엄마는 나 키울 때 힘들었어?”


순간 당황해 “아니, 전혀 힘들지 않았지. 너는 엄마를 힘들게 한 적이 없었어. 얼마나 예뻤다고. 엄마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도 절반은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챈 듯했다.


솔직히 힘들었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특별해지는 꿈, soodgarac, 2024

둘째는 큰아이보다 무던하고 건강해서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웃는 아이였다. 하지만 남편과 주말부부를 시작한 시점이었고, 시댁도 친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움을 받을 곳이 없던 나는 두 아이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고 있을 뿐이었다. 우울감은 심각할 정도로 깊어졌다.


둘째가 18개월쯤 되었을 때 어린이집에 보내고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림을 다시 시작했고, 도서관 봉사로 집 밖에 나서며 조금씩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절실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몇몇 나쁜 보육교사의 사건이 언론에 오를 때마다 모든 어린이집이 싸잡아 비난받았고, 화살은 곧 엄마들에게까지 향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는 특히 더했다. 나라에서 출산율 증가를 위해 보육비 지원을 시작했고, 어린이집에 많은 아이들이 보내지던 때였다. 아이들 돌보는 일에 세금이 들어가는 것이 내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였을까.


“보육교사 자격증 따는 게 너무 쉬워서 그렇다”, “그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 애들을 괴롭히냐”며 보육교사들이 가진 자부심을 흔들고 그들의 직업을 하찮게 만들려 했다.


“제 아이도 못 키워 어린이집에 맡기느냐”, “옛날에는 그런 거 없이도 다 키웠다”, “애 맡겨두고 카페나 다니는 한심한 엄마들” 같은 댓글은 ‘모성은 본능’이라는 명제를 전제한, 편리하고도 폭력적인 말들이었다.


그 명제 덕분에 세상 모든 이들이 보육교사와 엄마들을 향해 마음껏 혐오할 자격을 얻는 셈이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있다. 어린이집만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서 관계를 맺는 모든 곳에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단 한 번의 사례를 집단 전체로 일반화하는 건 옳지 않다. 그건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이자, 폭력이다.


대한민국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절대다수의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계신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직접 경험한 육아는 절대로 돈만 좇거나 시간만 때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는 상태에서는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 그런 상황은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절실했던 그 도움을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주었다.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의 콧물을 닦고, 기저귀를 갈고, 흘린 밥풀을 치워내는 일은 결코 가벼운 노동이 아니다. 그들이 받는 월급은 그 노력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선생님들은 되도록 웃는 낯으로 아이들을 대하려 애쓴다.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을 존경한다. 그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가 높은 월급으로 보답되기를 바란다.


“엄마는 나 키울 때 힘들었어?”


“솔직히 힘들었어. 아이를 키운다는 건 많은 사랑과 동시에 끝없는 노동이 필요하거든. 혼자 하기에는 버거운 순간들이 많았고, 그때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엄마를 많이 도와주셨어. 덕분에 너를 잘 돌볼 수 있었지. 정말 고마운 분들이셨어. 그러니까 선생님들 만나면 반갑게 인사드리고, 예쁘게 키워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말자.”


라고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거짓말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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