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물 사전
내 스마트폰에 넌 ‘내 사랑’으로 저장되어 있어.
나는 널 ‘내 첫사랑’이라 자주 불렀지.
아빠가 서운할까? 하지만 아빠도 잘 알 거야. 엄마와 비슷한 마음일 테고.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처음 엄마에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동안 알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의 방식을 너를 통해 배웠단다.
그래서 넌 언제나 엄마의 첫사랑이야.
얼마 전 너의 중학교 졸업식을 다녀왔지. 한 팔로 감싸 안을 만큼 작았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 이런 날이 다 오다니, 쏜살같이 세월이 흐른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네.
너를 처음 만난 날의 느낌, 그날의 공기가 아직도 엄마는 생생해. 네가 태어난 날은 더위를 한풀 꺾이게 하는 비가 내렸어. 병원에 들어설 때는 한여름 같았지만, 너를 안고 퇴원할 때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지. 작고 소중한 네가 혹여나 찬바람에 감기가 들까, 엄마, 아빠는 너를 꽁꽁 싸매어 품에 안았단다. 찬 공기가 조금도 너에게 닿게 하고 싶지 않았어.
우리에겐 정말 작고 소중한 보물이었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로 어제 같은 기억인데 벌써 나를 고등학생 학부모로 만들어주는구나.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아빠는 네 졸업식에 일가친척을 다 부르고 싶어 했지만 너와 내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렸잖아. 대가족 속에서 장남으로 사랑받으며 자라온 아빠는 졸업식 때마다 친가와 외가의 모든 식구들이 함께 했다더라. 그때는 친구들과 간단히 사진 찍고 놀고 싶은데 쫓아 나온 일가친척들이 부담스러웠다고 했어. 그러면서 왜 자기가 아빠가 되자 네 졸업식에 모두를 부르고 싶다는 건지. 아빠는 예쁜 네 모습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났네. 엄마는 그런 아빠가 귀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엄마 집은 그런 대가족이 아니었고, 부모님도 많이 바쁘셨어. 아빠가 엄마의 중학교 졸업식은 어땠냐고 물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지. 사실은 잘 기억하고 있어. 그날 우리 가족은 모두 오지 않았단다.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내가 먼저 말했었지만, 정말 아무도 오지 않자 내심 서운해 속으로 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떠오르네.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바쁜 사정이 있으셨겠지만 말이야. 그땐 그런 걸 몰랐을 나이니까. 하긴 너에게도 엄마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서운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미리 미안해.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의심하지 않길 바란다.
쑥스럽다며 사진을 대충 찍으려는 너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네 생애 중요한 이 이벤트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엄마는 정말 행복했어. 대가족의 넘치는 사랑을 주지는 못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만큼은 원 없이 줄 수 있는 날이었지.
너에게 졸업 소감을 물으니 아무 생각이 없다고 했어. 그냥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고 퉁명스럽게 내뱉기만 했지. 속내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중학교 3년의 생활이 그렇게 지루하고 힘들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 엄마의 착각인가?
학업 성적은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오케스트라 활동을 성실하게 했고, 매년 학교 축제에도 즐겁게 참여하는 네가 정말 보기 좋았어. 덕분에 네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고 말이야.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기 쉬운 편은 아닌 아이라 나도 너도 답답할 때가 있긴 했지. 그래도 돌아보면 이만하면 별 탈 없이 중학교 3년을 잘 마쳤구나 싶다. 다행이야. 별일 없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매우 잘 알게 된 요즘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할까?
너는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지. 어른이 되면 운전면허증을 따서 직접 차를 몰고 여행을 다니는 게 꿈이라고 말이야. 엄마로서 하고 싶은 잔소리도 많아지는 꿈이지만, 그래도 꿈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또 생각해.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니 참 좋다. 부러워. 나도 너처럼 그런 상상을 해봤던가 하고 엄마의 어린 시절도 다시 생각해 봤는데 여러모로 네가 그때의 나보다는 더 현명한 것 같다. 넌 정말 멋진 청소년이야.
고등학생이 된 너의 삶과 모든 선택을 응원해주고 싶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자꾸 정신을 놓고 잔소리를 하게 될지도 몰라. 미안해. 엄마라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응원이면 충분할 텐데, 자꾸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네.
누구보다 너의 미래를 고민하고, 성장하려 애쓰는 것은 너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게.
이제 한 발짝 더 엄마에게서 떨어져 세상으로 가까이 다가갔구나. 나에게서 멀어지는 네가 너무 아쉽지만, 너만의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거니까.
너무 서두르지도, 늦지도 않게, 너에게 딱 적당한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길.
독립적인 인간으로 세상에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랄게.
졸업을 축하한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