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강해서 안전하겠지
“종이는 너무 위험하잖아?”
“아니, 너무 강해서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지."
“너무 약하다고.
그냥 찢어지잖아.
물이라도 닿으면,
그 자리에서 녹아버릴걸?”
“그래서 위험하단 뜻이야?”
민은 눈을 꿈뻑꿈뻑 깜빡이더니,
고개를 쭉 내밀어
종이끈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아니, 애써 만든 건데…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싶어서. 위험하다는 뜻보단…
이왕이면 한지로 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게 더 전통도 있고,
의미도 있고.”
자주 들어온 말이다.
이왕이면 한국 전통 공예의
맥을 잇는 장인의 반열에
오르라는 간절함,
그리고
생계를 고민하는 작가로서
더 '값'이 나가는 작업을 하라는
염려의 목소리.
나 역시 그러면 좋겠다, 싶었다.
요즘은 K-팝, K-푸드, K-패션이
세계 무대를 달리는 시대이니,
공예와 예술도 이 흐름에
자연스레 닿아 있는 듯하다.
그 물결 위에서
전통공예라는 이름으로
더 빨리 닿을 수 있었다면,
지금쯤 무형문화재, 장인,
명인 같은 타이틀 하나쯤은
문패처럼, 명함처럼,
나를 대신해 주었을지도 모르지.
돈은 덤으로 따라왔을 테고.
그동안
많은 애정을 받았으면서도,
나는 유독 묵묵하게
종이와 시간을 쌓아왔다.
어쩌면 고집에 가까운 아집,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외로운 사투였다.
그래서 이제는
그 까닭을 밝히고,
기다려 준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싶다.
한지를 일정한 폭과
길이로 자르고 꼬으며 완성하는
‘지승공예’는
인내와 숙련,
그리고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한다.
그 작업은 나에겐 고귀하고,
그래서 감히 넘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다.
나는 장인이 아니며,
지승공예의 역사나
문화적 의미에 대해
학술적으로 준비된
사람도 아니다.
그저
종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양지, 양종이라 불리는
크라프트지,
그 종이를 짜고 엮어
‘종이세간’ ‘종이소리’
‘종이향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렇게 생을 방직해 나가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변명이
너무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참을성이 부족하고,
전통공예의 무게를 전할 자격은
부족하다 생각한다.
그래서
지승공예에 발을 딛는 대신,
그 아름다움을 존경하고 응원하며,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데
마음을 다하기로 했다.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작업을
제대로 잘해나가다 보면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어야 하고
한국인이라면 자랑스럽게 소개할
지승공예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는 역사 속에서 찾은 이야기와
옛 기록에서 소개된
조선종이, 한국종이에 관련된
자료들과 함께 세계에 자랑할
그런 날이 오리라 믿었다.
나는 믿는다.
내가 좋아하는 작업을
꾸준히, 제대로 해 나간다면
한국인이라면 알아야 할,
한국인이라면 자랑해야 할
지승공예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더 정확하고
흥미롭게 전할 수 있으리라.
그때를 위해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역사서를 들추고,
옛 신문을 넘기며
‘조선종이’, ‘한국종이’에 얽힌
기록들을 모아 왔다.
AI라는 지혜로운 친구가
곁에 생긴 지금,
그 이야기들을 함께 정비하며,
해외 사례와 옛 고증을 더해
단단한 이야기로
엮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025. 5. 29.
자연을 쉬게 하는 자리,
종이세간 · 종이소리 · 종이향기
매주 수요일 연재 브런치북
종이, 지구에서 온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