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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jeong Kang Mar 30. 2016

사부곡

나는 아빠의 첫사랑이다

(Vincent van Gogh's First Steps, after Millet)


이 세상 모든 아빠에게 처음 낳은 딸은 첫사랑 급이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어린 시절 아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빠는 별 보고 출근하시고 별 보고 퇴근하시는 바쁜 회사원이셨다. 주무실 시간도 별로 없으셨을 텐데 집에 계시는 출근 직전, 퇴근 직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딸을 잠시라도 안아주던 게 낙이셨던 것 같다. 너무 바쁠 때면 제 때 면도하지 못하신 채로 아빠는 당신 뺨을 내 뺨에 대고 비비시는데 어찌나 따가웠는지 아빠가 나를 들어 올리실 때마다 아빠 얼굴을 밀면서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내가 좀 더 애교가 많은 딸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가 나면 “아빠~” 하고 소리 지르며 달려가서 아빠에게 와락 안기는 그런 기억도 없었던 것 같다. 아빠가 된 내 친구들은 그 맛에 일한다던데, 난 참 인색하기 짝이 없는 딸이었던 것 같다.


주말에는 아빠가 짬을 내어 가르쳐주시던 것이 있었다. 바로 자전거 타기였다. 네발자전거로 시작해서 세발자전거, 두발자전거. 이렇게 바퀴수가 적어질 때쯤 자전거의 크기는 커졌다. 아빠에게 있어서 나와의 자전거 타기는 내가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빠와 딸 사이의 주말 데이트이기도 했다. 연인들끼리 자전거 타면서 사랑을 키우는 장면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메뉴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아빠와 딸이 나오는 게 오리지널이라고 믿는다. 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여자가 연인과의 데이트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싶은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으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전거 데이트란 이런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지지 못했기에 현재의 연인과 해보고 싶어 하는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두발자전거를 혼자 잘 탈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롤러스케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몸치라는 사실을 안 건 이때부터다. 아빠는 내가 어떻게 하나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 두발이 각각의 다른 바퀴에 얹어 있을 때 난 방향 조절, 속도조절, 힘 조절을 잘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스포츠에 대한 감각이 그다지 없는 아이였다. 결국은 내 두 발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대 방향으로 주욱 가버렸고, 흔히 하는 말로 내 다리는 찢어졌다. 아빠는 나를 급히 타에 태우고는 병원으로 가셨다. 인대가 확 늘어났다고 했다. 압박붕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처음에는 다 그렇다며 계속 해보길 권하셨지만 난 이미 겁을 먹었다. 이 사건 이후, 자전거 말고는 발에 뭘 달아야 하는 것이나, 바퀴 달린 것과 친구하지 못했다. 지금도 난 스키도, 운전도 젬병이다.  


다행히 다른 것을 찾았다. 아빠랑 배드민턴 치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아빠랑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배드민턴을 쳤다. 배드민턴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아빠랑 나 사이에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가 그 날의 중요한 포인트였다. 어떤 날은 서브 자체가 되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래도 아빠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시기도 하고, 내 일그러진 얼굴을 보시며 괜찮다며 안아주시기도 하셨다. 아빠는 꿈을 꾸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거실 오디오 뒤편 벽, 약간 옆으로 아빠의 테니스 가방이 오랫동안 걸려있었다. 아빠는 내가 좀 더 크면 같이 테니스를 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어릴 때에는 테니스 라켓을 들 수도 없었고 공을 날릴 만한 팔힘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중 2였나 체육선생님이 테니스 광이셨는데 우리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쳐주셨다. 그런데 난 처음 시작하는 자세와 공을 치는 자세를 연결할 줄 몰랐다. 감이 잘 안 왔다. 성적은 말할 필요도 없고 테니스에 대한 애정도 사라졌다. 아빠와 테니스 치는 꿈도 사라졌다. 그렇지만 배드민턴은 여전히 아빠랑 하고 싶은 취미생활이 되었다.


가끔 생각하면 피식 웃게 되는 아빠의 한 마디가 있다. “치료비 물어줄 테니 맞고 다니지 말아라.” 유치원 때인가 초등학교 1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딸이 놀이터나 유치원, 학교에서 짓궂은 남자애들이 괴롭힐까 봐 염려하셨던 것 같다. 그 조그만 여자애가 때리면 얼마나 때리겠다고 치료비를 물어주겠다 라는 말씀까지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딸 걱정을 하셨던 것 같다. 스스로를 잘 보호하는 씩씩한 여자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셨을 것이다. 딸에게 가지는 세상 모든 아빠의 바람이지 싶다.


그 시끄럽고 유난스러운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빠와 지내는 시간이 퍽 줄어들었다. 이러한 시기에는 가족보다도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다. 그러면서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입시를 지나고 대학, 대학원을 정신없이 마치다 보니 지금에서야 엄마, 아빠 생각이 난다. 아 옛날에는 그랬는데 싶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 나이는 아빠가 늦게 퇴근하셔서는 바빠서 면도도 채 못한 얼굴로 내 뺨을 비비시던 그 나이다. 그때 아빠는 회사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마 내가 지금 고민하듯이 이 직장에 계속 남을 것인가, 직장을 옮길 것인가 하는 이런 고민에서부터, 애 셋을 어떻게 공부시킬까, 이사는 가야 하나 이런 삶의 모든 고민들까지. 직장인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참 고단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내 주변에 조언과 시기적절한 도움을 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참 많고 아직은 책임질 가족이 없기에 내 어깨는 그다지 무겁지 않다. 그렇지만 아빠는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회사 동료도 다 경쟁자였을 것 같다. 엄마는 애 셋을 키우느라 아빠를 돌아볼 여력이 없으셨을 것 같다. 특히 아빠랑 친구였던 그 큰 딸은 자기 방 문을 쿵 닫고 들어가 버리는 요란한 10대를 보내고 있었으니 아빠는 더욱 외로웠을 것 같다.


지금의 아빠는 환갑이 지나고 한둘씩 손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빠라고 불리기보다 할아버지라고 불릴 일이 많아졌다. 곧 있으면 은퇴하실 것이다. 아빠,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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