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 깃털들
아이를 원치 않던 부부는 이웃의 식사초대에 응한다. 도착한 차 앞에 불쑥 등장하는 공작, 안주인의 흉물스러운 치형, 연쇄추돌을 일으키는 카레이싱, 못생긴 아기까지 난감한 상황의 연속이다. 조이는 무대에서 사라졌다(41쪽)
집안을 휘젓고 다니던 낙원의 새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사라졌다. 깃털을 선물로 받고 그들은 아기를 갖는다. 모든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모두 괜찮아질 거야.(39쪽) 치아본을 뜨듯, 같은 코스를 돌듯 비슷한 삶으로의 회귀. 빨려들 듯 들어와 낙원의 흔적인 깃털을 쥐고 인생을 낙관하고 있다.
# 셰프의 집
헤어진 혹은 별거 중인 남자와 여자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그들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나 보다. 아이들은 이미 장성해서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고 빌린 집에서 과거의 상처를 묻고 새롭게 시작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다시 집을 비워줘야 할 상황. 과거의 따뜻한 한 때를 떠올리며 마지막 식사를 하는 모습이 애잔하다. 읽는 내내 아련한 바람이 부는 듯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
# 보존
해고된 남편이 하루 종일 소파에서 보낸다면. 신문을 들이 파고 출근했을 때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미라처럼. 사랑을 나눴던 소파조차도 원망스러운데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냉장고도 말썽이다. 경매를 통해 새 냉장고를 사자고 제안하는 여자. 녹아버린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는 순간, 식탁 위에 물과 남편의 맨발옆에 고인 물을 발견한다. 고장 난 냉장고처럼, 녹아버려 부패직전의 재료들처럼, 삶이 가라앉고 있다.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조차도 삶이고 현실이라는 냉엄한 진실을 담담하게 풀어낸 이야기.
# 칸막이 객실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리라. 마이어스는 아내와 결별하고 8년 만에 아들을 만나러 간다. 아이 선물로 고가의 손목시계도 준비했다.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시계는 사라졌고 분노 속에서 진심을 마주한다. 기차에서 내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마이어스. 조차장에서 객차는 분리되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실려 가고 있다. 살면서 여러 가지 인연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면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들은 덜 만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해불가의 인간이 부모와 자식이라면? 얘기는 또 복잡해진다. 자식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 우리의 정서와 맞서는 증오이면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감정의 민낯을 마주하고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 남자에게 비도덕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진심을 다한 위로가 마음을 어루만질 때가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과 고독을 끌어안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에 조금의 위로가 될까. 순탄하고 만족스럽게 살아왔던 하워드와 앤의 아이는 생일날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들의 삶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이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잠깐 들른 집에 때마침 걸려오는 전화. 아이와 관련된 협박전화라 생각하고 분노에 휩싸이는데... 아이는 결국 생명을 다하고 절망한 부부는 아이의 생일케이크를 찾아가라는 독촉전화였음을 기억하고 빵집에 찾아간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과 어이없는 전화에 분노하며 찾아갔지만 따뜻한 빵과 커피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인생이야기에 젖어든다. 진심 어린 위로로 상처를 치유해 가는 이야기는 갓 구워낸 빵처럼 포근하다. 결국 사람이 상처를 치유한다.
# 비타민
병원에서 변변찮은 일을 하는 남자. 비타민 방문판매를 시작한 아내의 일은 성장하는 듯하다 시류를 타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비타민을 사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내 말이 들리지 않아?"(140쪽) 자신의 일에 대해 비참해하며 꿈조차 비타민 꿈을 꾼다고 자책하는 패티. 칸막이안에서 아내의 친구와 썸을 만들어보려던 남자는 베트남전에서 막 돌아온 남자가 던지는 폭언과 상징적 물건인 "잘린 귀"에 정신이 든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저것 계속 떨어졌다.(154쪽) 집에 돌아온 그는 두통 때문에 아스피린을 찾지만 알 수 없는 분노와 회한에 휩싸인다. 화장실 거울 속에 아내의 어떠한 말도 들으려 하지 않던 자신의 민낯이 있다. 소통의 부재가 삶을 잠식해 가는 이야기는 깊은 울림이 있다.
# 신경 써서
알코올중독자 로이드는 아내와 떨어져 지내며 술을 줄여보려 한다. 오로지 샴페인의 양을 줄이는 것으로 목표를 세웠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갑자기 한쪽 귀가 들리지 않자 머리를 때려보지만 통속에 갇힌 듯 답답하기만 하다. 손톱깎기의 줄칼에 화장지를 감싸 면봉을 만드는 여자. "신경 써줘." 그가 말했다. "부탁이야"(165쪽)
아내의 말에 무감각했던 남자가 자신의 귀지를 빼내려는 아내에게 신경 써달라 한다. 따뜻한 베이비오일로 꺼내준 커다란 귀지를 보며 들으려 하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하는 남자. 그러나 여전히 관계의 끝을 고하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말을 하는 동안, 그는 입술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그 말을 끝마친 뒤, 그녀는 "안녕"이라고 말했다.(171쪽)
오래전에, 자신들에게는 ESP*가 있어서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느끼던 시절도 있긴 했다. 누가 말을 시작하면 다른 쪽이 그 말을 끝낼 수 있을 정도였다.(164쪽)
*ESP(Extrasensory Perception)-텔레파시처럼 오감이 아닌 다른 감각을 이용해서 인지하는 능력
#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야성의 부름"을 쓴 작가 잭 런던은 술 때문에 죽었다. 프랭크 마틴 치료센터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술을 끊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술 때문에 망쳐버린 구구절절한 인생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의지하는 모습은 눈물겹다. 왜 사랑은 유효기간이 지나면 냉담해질까. 사랑이 시작될 때 서로에게 열려있던 마음은 점점 닫힌다. 새해인사를 하기 위해 치료센터에서 수화기를 든 남자. 받지 않을 전화기를 들고 대답만을 웅얼거린다. 어디서부터 일그러진 걸까. 그들의 인생은.
# 기차
한 남자를 죽이려다 권총을 핸드백에 숨긴 채 기차를 기다리는 여자. 복잡한 사연으로 잔뜩 성을 내는 중년 여자와 무감각한 노인. 역 대합실에서 그들의 이상한 만남은 시작된다. 자신들의 일에 무심한 여자가 불만인 중년여자. 너무 늦은 시간에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객차 안의 사람들. 세상은 별의별 종류의 일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이 일은 예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승객들은 역을 바라보며 그 역에 기차가 서기 전에 저마다 빠져들었던 생각, 그러니까 저마다의 문제들로 돌아갔다.(215쪽) 말없는 여자의 사연이 궁금했던 중년여자처럼 객차 안의 사람들의 호기심도 딱 거기까지다. 누구나 타인의 인생에 너무 깊이 들어가려고도, 들어오는 것도 반기지 않는다. 타인에게 극적인 사연도 그저 타인의 문제일 뿐, 잠깐의 호기심을 충족한 후엔 저마다의 문제로 돌아간다.
# 열
두 아이들의 베이비시터를 구하지 못해 곤경에 처한 남자. 아이들을 방치한 채 술파티를 벌이는 십 대 베이비시터를 쫓아 보낸 후 일상이 마비된다. 결국 떠난 아내가 소개해준 웹스터부인의 극진한 사랑과 배려 덕분에 그는 일상의 행복을 되찾는듯하다. 갑자기 끓어오르는 열에 며칠을 고생하고 일어난 남자. 여러 사정으로 웹스터부인이 떠나게 되고 아내와 관련된 모든 것이 끊어진다. 그녀를 향한 분노와 원망, 의존, 사랑의 감정들은 열과 함께 소멸된다. 비로소 그만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254쪽)
# 굴레
경마에 빠져 가사를 탕진한 남자는 두 아이들과 새로 만난 여자와 떠밀리듯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다. 여자는 웨이트리스로 생계를 이끌고 남자는 그림자처럼 집에 머문다. 그녀의 긍정적인 기운도 남자의 어두움에 잠식당한다. 늦은 밤 입주민들과의 술파티가 벌어지고 남자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떠나온 그대로 다시 길을 떠나는 그들. 남자가 남겨둔 말굴레를 한참 들여다보는 화자. 말에 탄 사람이 고삐를 당기면 방향을 바꾸게 하는 말굴레 중 강철로 만든 재갈을 본다. 과거와 인생이라는 재갈이 당겨지며 어디론가 가고 있을 그 가족들을 생각한다.
# 대성당
결혼 전부터 책 읽어주는 일을 했던 아내의 맹인 친구가 방문한다. 남자는 달갑지 않은 그 방문에 볼링을 치러 가자고 제안한다. 둘 사이에 영혼이 소통하는 느낌을 받으며 소외되는 남자는 소통을 외치지만 소통하려 하지 않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남자는 TV에 나오는 대성당을 설명해 주며 자신의 말이 얼마나 빈곤한지 깨닫는다. "이 사람아, 다 괜찮네." 그 맹인이 말했다. "난 좋아, 자네가 뭘 보든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오늘 밤에도 내가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그가 말했다.(335쪽) 함께 연필 쥔 손을 붙잡고 대성당을 그린다. 비로소 맹인에게 보는 법을 배우는 남자. 무한의 공간에서 오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경험한다. 비로소 소통이 시작된다.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맹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았다.
"감았나?" 그가 말했다. "속여선 안 돼."
"감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계속 눈은 감고." 그가 말했다. "이제 멈추지 말고. 그려."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도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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