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등에 대하여

by 차은숙

책등에 대하여


도서관 800번 문학 서가 앞에서 가만히 책등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 긴 서가를 조용히 느릿느릿 걸으면서 만나는 책등의 표정은 책의 숫자만큼 다양하다.

누군가는 곁을 주지 않고 딱딱하게, 누군가는 따듯하게 환대하는 표정을 짓는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은 친절하려고 애쓴다. 미묘한 표정은 다 다르지만.


책의 형태를 나타내는 말에는 신체 부위를 가리키는 말들이 여럿 쓰인다. 책 자체를 몸통으로 하여, 책의 낱장을 묶은 쪽을 책등, 등과 반대쪽 책을 여닫는 쪽을 배, 책의 위쪽 면을 머리라고 한다.

책등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다. 책의 두께, 질감, 색감처럼 실체적인 물성은 물론 책의 제목, 저자, 출판사를 어떤 집의 문패처럼 달고 있다. 종이책은 그 물성으로 책을 읽는 사람과 먼저 교감한다.


책등을 뜻하는 spine은 척추를 말한다. 우리의 신체를 곧추세우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 척추에 연결된 것처럼 책의 모든 페이지가 이 책등과 연결되어 있다. 책등이 없으면 책의 페이지도 낱낱이 풀어진다.


책등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누군가의 등을 보고 다가가 툭툭 건드려 악수하듯 대화를 시작하고 책과 만난다.

표지를 열기만 하면 연결될 수 있는 무수한 만남이 있다. 그 만남의 대상은 수백 년 전의 누군가이기도 하고, 지구 반대편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함께 살고 있기도 하다.

그 만남을 위해 도서관의 책등 앞에 조용히 다가서보면 어떨까?


이 도서관의 800서가는 맨위 책장 어딘가 802.3 위18o <이야기가 노는 법>에서 시작된다. 책장 몇 칸을 스치듯 지나면 <작은 사람 권정생> 810.099이18ㄱ의 기호로 서 있다. 811로 시작하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시집 책등과 만나다. <다시 읽는 백석 시> 811.6109백 54ㄷ,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811.7도75ㅎ 그곳에서 그 선연한 시어들을 오래 마주한다.


그 다음 813.6으로 시작하는 천인천색의 다양한 표정과 이야기가 계속되는 긴 서가는 소설이다. 소설 책장 앞에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온갖 이야기를 넘보다가 정갈한 산문 서가로 간다.

거기서 814.7 송74 <내 인생의 화양연화>에 시선이 꽂힌다. ‘화양연화’ 인생에서 꽃과 같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라는데, 나의 꽃다운 시절은 어디에?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직장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책등을 보며 설레고 표지를 열어 그곳에 이르른 곳마다 어떤 꽃이 피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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