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과의 추억

2월 13일 '라디오의 날'에 문득...

by 수키니피그

학창 시절 나의 꿈은 라디오 작가였다.

드라마도 아니고 예능도 아니고 다큐도 아니고 오직 '라디오 작가'가 되는 것.

그 시절 하교 후 집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내게 라디오는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어 주었던 친구였다.

어른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잔소리를 했지만 라디오를 듣는 건 언제나 프리패스였다.

덕분에 나는 그 당시 인기 있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대부분 다 섭렵하고 있었고 내 나이 보다 연배가 높은 오빠 언니들이 좋아하는 가요나 팝을 훨씬 많이 들었으며 양질의 정보를 받아들이며 또래들과의 지식적 교양적 격차를 넓혀 갔다.




그 시절 나의 사춘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두 존재는 서태지와 신해철이었다.

그중 신해철은 단순히 좋아했던 가수를 뛰어넘어 내 자의식의 철학적, 정서적 성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어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다.

신해철은 밤 12시에 진행하는 MBC라디오 '음악도시'의 DJ였는데 어느 날 재미있는 사연이 있는 청취자님은 전화를 주세요라고 하길래 전화를 했는데 덜컥 작가가 전화를 받는 거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하실 거예요?"

"저... 우리 학교 꽃무늬 교복 얘기 할 건데요.."

"교복에 꽃무늬가 있어요?" 작가의 목소리가 상기됐다. 희망이 보인다.

"네! 동복 말고 하복 블라우스가 온통 꽃무늬예요!"

작가가 전화를 잠깐 끊고 다시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숨죽여 기다렸다.

이윽고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 후에 전화연결 할 건데...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아까 하겠다고 했던 얘기 하면 돼요"

작가가 혹시 내가 헛소리를 할까 봐 단도리를 쳤다.

"네!"

드디어 나의 사랑하는 오빠! 해철이 오빠와의 전화연결이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자기소개해 주세요"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

나는 촌스러운 꽃무늬 교복으로 주변 학교뿐 아니라 우리 학교 선생님들에게 조차 조롱 아닌 조롱거리였던 우리 학교 꽃무늬 교복에 얽힌 에피소드를 학교 선생님 성대모사를 곁들여 나름 맛깔나게 들려주었다. 해철 오빠가 내 얘기를 깔깔 거리며 듣고 나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심지어 내가 고등학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름 뒤에 '씨'라는 존칭을 붙여)

"하하하하 아무게씨는 한 10년 후쯤 MBC에 텔런트로 지원을 하셔도 될 만큼의 연기력을 가지고 계신 것 같네요."

그때의 감격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직도 나를 "아무게씨는"....이라고 예의를 갖춰 불러주던 해철오빠의 그 나직하고 보드라운 음성이 귓가에 선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라이브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됐다.

그 후 신해철에게 '마왕'이라는 별칭을 만들어 준 SBS 라디오의 고스트 스테이션의 DJ를 할 때도 나는 열혈 청취자로서 마녀 마을의 일원으로서 암약했었다.

이처럼 라디오는 나에게 친구이자 추억이자 감성을 어루만져 주었던 위로자였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난 비록 연기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연영과에 진학하여 연극과 영화를 배웠고 비록 라디오 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대본 쓰는 일을 하고 싶어 도전 중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사람들 투성이다. SNS가 그렇고 각종 동영상 플랫폼이 그렇다. 이제는 라디오조차 보이는 라디오가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과연 듣는 것에도 그처럼 열심일까?

2월 13일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라디오의 날'이라고 한다. 보이는 미디어가 넘처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라디오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보급된 대중 매체라고 한다. TV나 인터넷이 불가능한 오지에서도 라디오는 잡히니 말이다.

더 버글스(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곡은 1979년에 발매되어 1981년 8월 1일 MTV가 개국하면서 최초로 방송된 뮤직비디오라고 하는데 그때는 보는 매체가 발달하면 금방 듣는 매체는 사라 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난 그 예상이 오래도록 빗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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