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당신은 혼자가 아니
요즘 사주를 보러 다녔다. 연초는 아니었다. 어느덧 6월이었다. 어제는 종일 비가 내렸다. 어느 집은 배수구가 막혀 연실 마당에 빗물을 퍼 날랐다. 얼굴이 똑같이 생긴 부부지간이 땀을 됫박으로 흘렸다. 나무가 닦여서 더 초록이었다. 사주에서 나는 을목乙木이고 당신은 정화丁火였다. 당신은 늘 손이 찬데 불이라니. 나는 또 손가락 끝을 작게 부러뜨려 당신에게 던졌다. 활활 잘만 탔다. 그럼 당신이 따뜻해서 좋았다. 사주에서 우리는 3년 뒤 이별할 팔자였다. 이토록 사랑하는 당신이 밉게 보일까. 그때 우리 얼굴도 조금은 닮아졌을까. 나는 좀 궁금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다른 이 품에 안겼던 당신이 내게 울며 안긴 적 있었다. 후회한다고 후회한다고. 활활 타오르던 당신은 그때도 내 가슴을 시커멓게 태웠더랬다.
왜냐하면 사는 게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주에 대해 궁금해할 이유는 다양하다. 그냥 호기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중요한 일을 기다리는 사람이 조바심을 느껴서 일 수도, 사랑하는 연인이 우리는 운명적인 사랑일까 하는 기대 때문에 보기도 한다. 나는 매년 사주를 본다. 왜냐하면 사는 게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나는 곧잘 길을 잃는다. 나침반을 들어도 바늘은 멈추지 않고 휙휙 돌아간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그래서 나는 매해 시작점마다 가게에 가서 지도를 사듯 사주를 본다. 그렇다고 내가 사주를 맹신하는 건 아니다. 재벌의 사주를 갖고도 거지처럼 사는 사람도 있고, 흉한 사주를 가지고도 성인聖人처럼 사는 사람도 존재한다.
내게 사주란 통계자료 같다. 앞선 조상들이 태어난 시간과 날짜로 대부분 그쯤 살았더라 하는 의미 말이다. 마치 시험 보기 전 어느 과에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 같은 정확도. 그대로 믿기에는 불안하고 의심 없이 믿자니 바보 같은 느낌. 하지만 나는 매년 사주를 보러 간다. 어쨌든 아무 준비 없이 시험장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타국에 여행을 가더라도 조심해야 할 음식이나 장소는 미리 알고 가는 게 안전하다. 내게 사주는 그런 의미다. 망망대해에 쪽배를 타고 가는데 저기 멀리서 작은 파도만 오는지 집채만 한 해일이 오는지 어쨌든 알고 가보면 노를 저어서 앞으로 갈지 빙 둘러서 가볼지 미리 판단한 기회는 있으니 말이다.
미친 짓이다.
사랑은 혼자보다는 나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상생해야 된다. 어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한쪽만 힘들다. 저 사람은 느긋한데 자꾸 나는 없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환장하는 건 그래도 행복하다는 거다. 미친 짓이다. 내가 없어지는데 없어지는 나를 안아주는 그 손길이 좋아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자기 파괴도 사랑의 일부다. 일단 나를 파괴해야만 그를 위해 바뀔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만 파괴된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부르기보다 다르게 불러야 한다. 집착? 소유욕? 그것도 아니라면 나 혼자만의 착각?
사랑은 수학이 아니라 논술 문제 같은 거다. 해답이 없다.
그(그녀)가 웃는 걸 보며 겉으로 따라 웃으면 좋아하는 거고, 그 웃음을 지켜보며 속으로 행복해지는 건 사랑이라고 한다. 나의 어떤 것을 태워서라도 지키고 싶은 미소와 안고 있으면 세계를 품고 있는 기분이 드는 사람이 있다. 포개어진 서로의 접선에서 해가 뜨고 달도 뜬다. 그렇게 사랑은 두 개의 세상을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중요한 건 둘 중 어느 하나의 세계도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침략이고 강탈이고 다른 한쪽의 멸종이다. 근데 말이다. 그런 게 사랑이 아니라고 과연 내가 정의 내려도 될까? 한쪽만 타버리고 재만 남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오만하게 선언해도 되냐는 말이다. 아니다. 사랑은 수학이 아니라 논술 문제 같은 거다. 해답이 없다.
둘의 사랑이 완벽한 무게로 저울의 평형이 맞춰진다면 행복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랑은 결국 둘 중의 한 명이 더 사랑하게 되는 구조다. 시장에 가서 흥정하듯이 깎거나 덤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명이 살면 다른 한 명은 죽는다. 진즉 더 사랑한 쪽은 더 파괴되는 쪽이다. 하지만 그 또한 사랑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좋고,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백번이고 똑같은 선택을 하는 것도 사랑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그렇고, 성직자들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또 너에게 나의 사랑이 그랬다. 끝을 안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었을 것이다. 3년 뒤에 헤어질 운명이라면 3년 동안 죽도록 사랑해 보고 그때도 사랑한다면 집채 만 한 해일을 향해 노를 저어 가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나 혼자가 아니라 그(그녀)도 함께일 것이다. 어쨌든 나보다 덜 사랑할지언정, 그(그녀)에게도 사랑이기는 매한가지였을 테니까.
사랑한다. 나보다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