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번지는 법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사람이 쓰는 것이었다.
부적을 찾았다.
새해마다 서랍이며 옷장이며
당신이 숨겨둔 염려와 기원들.
대관령의 초원을 본 적이 있었다.
양 떼 중에
한 마리가 울면
여러 마리가 따라 울었다.
못 생긴 노래였지만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다.
여름 하늘은 불을 지른 것처럼 뜨겁다가
저녁에는 손톱에 봉숭아물이 든 것처럼
분홍빛으로 사그라들었다.
당신이 저 하늘 좀 보라고 했다.
얼굴이 꽃처럼 발갰다.
연 초부터 속 시끄러운 일이 많았다.
나는 서랍과 옷장 안에서
자주 울었다.
아름답지가 않았다.
나다움에 대해 쓰기로 했다.
그런 것은 아름답지 않아도
쓰게 되었다.
비가 그친 새벽이면
젖은 초원에서
노래도 부르고 하늘에 불도 지르고
부적도 사방에 날리고
거기서 실컷 놀다 온 당신이
저것 좀 보라고 외쳤다.
꽃처럼 발갰다.
손톱에 봉숭아 물이 든 것처럼
아름다운 것들이
분홍빛으로 한데 모여서
나도 이제 더는
울지 않기로 하였다.
모든 예술은 결국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그 아름다움은 누구나 아는 외적인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예술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기를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은 바랄 것이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란 어렵지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건 그만큼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일은 훈련에 가깝다. 매일 보는 하늘, 거리풍경, 사람들, 연인의 얼굴 등 그것을 일상으로 치부하면 아름다움은 언제나 멀다. 일상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그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일, 나는 그것을 시라고, 예술이라고 믿는다.
내 시를 쓰지만 타인에게 평가받는다는 건 다른 일이다. 문학상이나 출판사에서 바라는 아름다움과 내 시의 아름다움이 같을 수는 없다. 입상과 출간을 원한다면 다른 시인들이 쓰는 것처럼 현대시와 문단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게 주류 문단에 편입되는 일일까. 아니면 나만의 작업을 해나가는 일일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나는 다수의 아름다움을 쫓는 작가가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나의 치기 어린 핑계일 뿐이다. 문단의 흐름이고, 내 미적 기준이고 나발이고 다 떠나서 좋은 시는 좋은 시다.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모든 거절의 이유를 상쇄한다.
나의 아름다움은 아무도 모르게 날 위해 숨겨둔 부적과 한 마리가 울자 따라 울어주는 양 떼의 울음소리와 '0저 하늘 좀 봐'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나와 나누고 싶어 하는 당신의 옆얼굴이다. 기침을 하고 있으면 내게 미지근한 물을 떠다 주러 가는 발걸음과 등허리가 가렵다고 하면 손톱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쓰다듬어주는 손길이다.
나는 먼 길을 돌고 돌아 혼자 실패하고 자책하고 절망에 빠져가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잊지 않기 위해 써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시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은 너무 연약하고 쉽게 잊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손톱에 물든 봉숭아물처럼, 언제가 태워지고 마는 부적처럼. 아무리 여러 마리가 따라 울어도 결국, 멎고 마는 울음소리처럼.
나는 이제 내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지 않기로 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 아름다움을 찾기로 하였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로 인하여 출간하지 못하고 입상하지 못하고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 해도 부족한 일이 아니다. 언제나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나다. 미안하지만 나는 나의 첫 번째 독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름다움이 결국에는 나다움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름답지 않지만
이제 그 사실 때문에 울지는 않는다.
그 확신이 오늘 또 한 번,
나의 아름다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