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인 당신, 부유 중인 배
요전 날 몸을 씻는데 가슴께에 푸른 반점이 보였다. 멍이 들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다음 날에는 명치까지 퍼렇게 번져있었다. 그것은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한가운데 하얀색 점이 하나 생겼다. 나는 당신에게 내 푸른 반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그냥 가버리고 말았다. 의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먼저 말해야 치료해 줄 수 있다며 수면제만 처방해서 돌려보냈다. 그러는 사이 반점은 이제 허벅다리까지 번져있었고 하얀색 점도 더 커져있었는데 이제 그것은 점이 아니라 배처럼 보였다. 목까지 번진 반점 때문에 밖에 나다니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는 또 당신에게 내 반점에 대해 하소연하려고 했지만 당신은 이제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당신은 늘 그랬다. 극장에 갈 때도 비상구부터 찾았다.
나는 한밤 동안 거울에 내 반점을 비춰보고 있었다. 계속 보다 보니 그것은 이제 그리 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바다였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흰 조각배가 안간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 남자가 이를 악물고 노를 젓고 있었다. 그러나 근처에 육지는 없고 온통 파란색 바다뿐이었다. 남자의 노질이 점점 무거워졌다. 끝이 없어 보였다. 밤새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그 배를 내려다보며 당신 생각을 했다. 비상구를 찾던 당신의 표정을 다시 떠올리는데 어디선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갈매기 우는 소리. 끈적한 바람에서 짠 내가 나고 얼굴에 물이 튀고 노를 젓는 남자의 얼굴이 왠지 나와 닮았고 전화를 걸어도 당신은 여전히 모른 척을 하고 모른 척하고 우리는 원래부터 아는 게 없었다.
푸른 반점이
거대한 해일처럼
나를 덮치고
조각배 위에서
내가 이를 악물고 노를 젓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고통과 불안까지 나눌 사람. 온전히 함께 하는 사람이란 건 그런 의미 같다. 좋고 이쁜 것만 나누는 게 아니라 역겹고 불쾌한 것마저 나누고 괜찮다며 일으켜 세워줄 사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려고 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외로움만을 해소하려는 게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채워주고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 아닐까.
내 고통과 불안을 나누려고 했더니 '힘든 건 각자 알아서 버티자'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나쁜 것을 가져다 놨으니 말이다. ‘얼른 치워’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못한다면 그게 과연 사랑일까?
좋은 일에는 하하 호호 웃으며 세상 내 사람 같다가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도망부터 치는 사람이 있다. 맞고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어쨌든 성향의 차이다. 생존본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회피하려는 사람도 존재한다. 생존확률을 높이는 전략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다르다. 사랑 앞에서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수 없다. 문제를 직면하고 싶어도 도망가야 할 때가 있고 도망가고 싶어도 직면해야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선호하는 방식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될 때도 있는 것이다. 그 방식을 조율하는 과정, 어렵고 불안했던 일을 함께 겪어냈던 경험. 이런 것들이 모이고 쌓이면 관계는 더 강해지고, 나는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이 시를 쓰면서 나는 ‘상처’보다 ‘바다’라는 이미지에 오래 머물렀다. 상처는 보통 닫히기 위해 생기지만, 바다는 끝없이 열려있다. 파도와 해일도 반복해서 밀려온다. 그 안에서 조각배는 계속 노를 젓는다. 당신은 나의 노질을 모른 척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를 악물고 노질을 한다. 사랑 없이 바다 위에 내던져진 존재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다. 이 시는 허구에서 출발했지만 지금 내 마음 어딘가에도 집채만 한 해일 앞에 속수무책인 내가 있을 것이다. 도와달라고 내민 마음을 거절당하고 힘든 건 각자 해결하자던 비수 같은 말이 가슴에 꽂힌 내가 그럼에도 살아내겠다고 끝없이 노질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을 포기하면 모든 걸 잃는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속도가 다를 뿐이다. 빨리 도착한 사람은 인내를 배우고 늦게 도착하는 사람은 고마움을 배운다. 당신의 비수도 내게는 사랑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를 악물고 포기하지 않는 건 저 망망대해 어딘가 당신 또한 표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방법이 다른 거다. 틀린 게 아니다.
포기한다고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랑을 포기하고, 희망을 포기해 봤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재와 먼지뿐이다. 손에 굳은살이 배기고, 입에 단내가 나고, 몸이 부서져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괜찮다.
저 푸른 반점 어딘가에 힘든 것은 함께 해결하자고
내 바다에 풍덩 뛰어드는 사람은 분명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