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혜화동오로라 Nov 01. 2020

복숭아는 잘못이 없다



깐깐한 학부모였고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택시를 자주 탔다. 말이나 행동도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간단한 문자를 보내는데도 두 세번은 수정해서 보냈다. 학부모님이 ‘10분 정도 늦을 것 같은데..’ 라며 수업시간을 늦추거나 다른 날 수업 요청을 해왔을 때도 싫은 내색 없이 최대한 맞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회사 시스템과 학부모의 실책이 합쳐 내 잘못이 아닌데도 학부모의 불만사항을 머리를 조아리며 듣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이지만 긴장되는 수업이 있는 날은 나도 모르게 퇴근길이 더 힘들고 지쳤다.


 일주일 50개 수업이 있다. 모든 수업이 그랬다면 나는 1년도 안되어 진작 회사를 때려치웠을 수도 있겠지만 감사하게 대부분은 '언니'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 더 많았다.  고마운 학부모님 덕에 10년 이상 이 일을 할 수 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감사)






 비가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퍼붓는 찬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다 가리는 날, 분명 우산을 쓰고 있는데도 옷이 다 젖는 이상한 날이다. 비가 오는 것도 불편하지만 긴 장화와 백팩이 젖지 않게 걷는 것도 신경 써야 하고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 신경 쓰이는 수업도 있다. (....집에 정말 가고 싶은 날이다ㅠ)


아파트 근처에 도착했다. 내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멈춰 섰고 운전석에서 잘 갖춰 입은 중년 남성이 장우산을 들고 내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뒷좌석 문을 여는데 여자아이가 내렸다. 기사님이 있는 집도 있구나, 쓱 한번 돌아보고 늦으면 안 되니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고 올라가는데 ‘잠시만요’하는 소리와 함께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린다. 아저씨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는 내가 수업 가는 집의 아이다. 방금 전까지 울상이 다 되었던 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젖은 옷과 백팩에 머리도 엉망이지만 “어머, 지연아!” 하며 자동으로 자본주의 웃음과 목소리가 나온다.


“아버님이세요?” (아닌 거 알고 있지만 확인차 물어본다)

“아니요, 기사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짧은 사이, 우리 셋의 모습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였다. 셔츠와 바지, 구두로 잘 차려입은 젊은 기사님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매무새 단정은 물론 비 한 방울도 안 맞은 거 같은 ,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더워도 추워도 날씨와 상관없이 늘 예쁜 여자아이. 그 옆에 비에 젖은 생쥐 꼴, 나.


'띵' 소리와 함께 같은 층에서 지연이와 내가 내렸고 기사님은 현관에서 집 안 이모님께 아이를 인수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내려가셨다. 기사님이 있고 가사를 도와주는 이모님이 있고 아이도 봐주는 시터분이 있는 집. 뭐, 이모님과 시터분까지는 늘 봐왔지만 주차장부터 아파트 입구, 현관, 집안의 모습까지 영화처럼 지나가면서 이 아이의 일상도 그려지며 부. 럽. 다.. 기 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던 거 같다. 적응 할 만도 한데 압구정은 도무지 적응이 어렵다.


 자본주의 웃음과 목소리를 아무리 내어도 무거운 마음은 어쩌지를 못해 중간중간  숨을   쉬었고 아이가 쳐다볼 때면 애써 웃었다.  그날은  크게 웃고  열심히 수업을 했다. 수업을 마치고 여전히 높은 텐션으로 아이와 인사하고 이모님과는  세상 텐션으로 인사를 하고 나온다. 현관문이 닫히면 그제야 편안한 상태의 내가 되는데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사람이   같은 기분. 바닥까지 내려가 앉은 마음은 내버려   아무  없었다는  수업은 수업대로 잘하고 퇴근해서 집이다.





신혼인 우리는 남편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상을 차리고 디저트나 과일을 준비해놓는다. 내가 과일을 좋아하니 오늘은 복숭아를 사 왔다며 냉장고에서 4개 1000원짜리 복숭아를 꺼낸다.


“이거 4개에 1000원에 사 왔어. 상태가 좋진 않지만 먹을 만해. 어때 잘했지?!”

“..........”


평소라면 ‘진짜?! 우리 남편 잘했네! 저녁 먹고 과일 먹자!’라고 했을 텐데 그날은 마음도 곱지 않으니 말도 곱지 않다. ‘아 짜증 나 짜증 나. 왜 이런 거 먹어야 해?! 그냥 제대로 된 거 사 먹으면 안 돼?!’ 라며 울기 직전이다. 오늘 여차저차 이랬고 저랬다며 이야기를 내놓았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저 놈의 복숭아를 당장에 가서 버려야지!! 복숭아, 너 이리 와! 복숭아가 잘못했네 잘못했어. 봐봐 지금 쓰레기통으로 간다 응?! ’라며 우스꽝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나를 웃겨버린다. 하루 종일 참아둔 눈물이 남편 앞에서 주르륵 날 것 같은데 너무 웃어서 나는 눈물이 되었다. 무거웠던 마음은 어느새 다 날아가 온데간데없이 여기저기 멍이 든 복숭아를 예쁘게 잘 깎아 먹었다.


복숭아는 잘못이 없다.




이전 04화 선생님 영어발음 이상해요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압구정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페이스북·트위터로 가입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