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때마다 부모님이 계시는 문경에 간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두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는 길 마저 매번 설렌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와 언제 가도 반겨주는 부모님을 보자마자 나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다. 하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을 계획해 혼자 하기도 하고 부모님과 같이 하기도 한다.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저녁에 고기를 먹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하고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하는데 서울에서도 늘 하던 것이고 서울이 오히려 더 맛있고 다양한 메뉴들이 있는데도 나는 문경에서의 시간이 더 즐겁다. 저녁 8시가 되면 동네 불이 다 꺼져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고 고요한 밤도 좋고, 새벽부터 울어대는 수탉소리와 동네 어르신들이 벌써 나와 인사 나누는 정겨운 아침 소리도 좋다. 한 동네가 다같이 자고 다같이 일어나는 기분이다.
산세에 둘러싸인 집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저녁노을은 하늘색과 분홍색으로 어우러진 그때 아빠와 이모부는 장작을 패고 있고 이웃집 아주머니는 저녁상을 차렸다며 밥을 먹고 가라고 하신다. 엄마는 산 저 윗집에 동생이(나에게는 이모) 저녁 벌써 다 차려놔서 못 먹고 간다고 하니 이웃집 아주머니는 식기 그대로 포장을 해서 우리 손에 들려주셨다. 분명 서로를 위한 마음인데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 억양과 큰소리에 다투는 듯 하지만 그들의 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괜히 무엇인가 울컥 올라왔다.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나도 알 수 없도 무엇인가가. 아름다웠다. 시골 풍경 안에 시골 사람들이 동화같이 순박하고 아름다워서 그랬다.
2박 3일의 휴가를 마무리하고 혼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또 주책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문경에서의 시간이 좋았고 짧았고 아쉽다. 지금껏 살던 집을 떠나 부모님과 헤어지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창문 밖으로 휴게소에 쓰여 있는 문경이라는 두 글자가 보인다. 문경아, 예천아, 상주야. 옛날 사람들은 자기 출신을 서로 이름으로 불렀다는데 나도 '문경이', '문경댁' , '문경네' 로 불려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홉 살 때 엄마 회사 발령으로 온 가족이 서울로 오게 되었다. 너무 어릴 때 오게 되어 서울이 좋은지, 문경을 떠나게 되어 아쉬운지의 별다른 생각이나 감정이 없었다. 부모님을 따라 올라왔고 전학을 했고 어찌어찌 살다 보니 30년이 다 되어간다.
어린 시절 우리는 강에서 송사리도 잡고 수영도 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탔다. 온 동네가 우리 놀이터였다. 할아버지 경운기를 타고 초록이었다가 노랑이었다가 하는 드넓은 논을 지나다녔고 책가방을 메고 매일 학교 가는 길도 흙으로 쌓아올린 논두렁이었다. 아스팔트 보다 흙 길이 더 좋다. 도시뷰, 한강뷰 보다 '논뷰'가 좋다. 이번 휴가 때 우리동네 논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서울보다 시골이 더 좋다.
남편과 제주에서 일주일 휴가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 우리의 모습은 상반됐는데 나는 서울에 갈 생각에 벌써 답답하고 우울하다고 했고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드디어 서울로 간다며 좋아했다. 제주는 섬이어서 좁고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없어 그간 답답했다고. 서울은 육지이면서 넓고 산이든 바다든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 벌써 신나 했다. 남편말이 맞는데 나는 반대로 제주의 작은 섬을 떠나는 게 아쉬웠다.
시골여자가 서울에서 공부하고 결혼도 하고 자리도 잡았으니 이만하면 출세했지 하다가도 늘 돌아가고 싶은 우리 집 문경, 평생 시골에서 살았던 아빠는 서울살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3년 만에 다시 문경으로 내려가셨는데 나는 30년째 아직도 문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