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 국민학교 시절,
영애의 전화국 일은 주간일과 야간일이 일정치 않다. 진희, 선희, 미희, 영희는 시골집 큰방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잤다. 아랫목, 몸 하나 뉘일 만한 이불만큼이 할아버지 차지였고 목침이라 불리는 딱딱한 나무 베개가 이불 위쪽에 놓여 있었고 옆에는 동그랗고 크고 무거운 유리 재떨이와 ‘솔’이라고 쓰여 있는 담배, 벽에는 우와기가 걸려 있었다. 외출을 하는 할아버지가 ‘우와기 가지고 와라’ 소리치면 진희가 까치발을 들어 벽에 걸려 있는 우와기를 가지고 나갔다. 손녀들 중 키가 가장 큰 진희가 할아버지 우와기 담당이었다.
볼거리가 텔레비전 밖에 없던 때라 오후나 저녁때만 되면 아이들은 조르르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텔레비전 안으로 디갈래?’ 할아버지 호령이 떨어지면 아이들은 곧바로 벽있는 자리까지 가서 앉았고 할아버지의 굵고 선명한 담배연기가 아이들 주변을 지나기도 했다. 텔레비전이 검은 점과 흰점이 한데 섞여 지직~ 소리를 내더니 화면은 보이지 않고 이내 소리만 들린다. 진희는 선희에게 안테나를 움직일 테니 화면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알려달라며 큰 방을 나섰고 할아버지 고무신을 신고 마당을 지나 창고로 이어지는 좁은 입구로 갔다.
“나와?!!”
진희가 목청껏 두 글자를 외친다.
“안 나와!!”
선희와 미희, 영희도 합세해서 세 글자를 외친다.
“지금은?”
“어어.. 나와 나와!! 근데 또 안 나와.”
“지금은?”
“.........”
“나와?”
“어어!! 나온다 나와!!”
기다란 막대 위에 여러 살이 붙어서 기우뚱 걸리는 안테나가 또 움직일라 조심조심 손을 떼고 진희가 재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탐험대>를 시청 중이었고 다행히 돈데크만의 주문 장면은 넘어가지 않았다. 돈데크만의 ‘돈데기리기리 돈데기리기리 돈데 돈데 돈데 돈데크만!!’ 넷이서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합창한다. 진희는 돈데크만의 차원을 관통하는 구멍을 볼때마다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가는 시간터널을 통해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엌에서 할머니가 저녁 준비 중에 일손이 필요하면 진희부터 부른다. 선희, 미희, 영희를 불러도 대답이 없으면 진희를 두세 번 더 부른다. 한창 만화영화에 빠져 가고 싶은 곳을 상상하고 그곳에서의 내 모습도 그려보던 진희는 텔레비전 보던 것을 뒤로하고 부엌으로 가서 할머니를 돕는다. 상을 펴고 숟가락을 놓고 할아버지 밥부터 할머니, 아빠, 동생들 밥까지 퍼 날랐다.
만화영화가 끝나자 선희가 와서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미희 영희는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할머니가 ‘할부지와 아빠 모시고 오라’는 말에 미희가 안방에 가서 “할부지 진지 드시러 오시래요.” 말하고 영희가 작은 방에 가서 “아빠 진지 드시러 오시래요.” 말한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부엌에 와서 앉는다. 할아버지가 한 숟가락을 뜨면 진희, 선희, 미희, 영희도 그제야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상에서 먹는다기보다 부엌문에 붙여서 밥솥과 주걱에 붙은 밥과 반찬을 덜고 남은 것을 한데 모아 먹었다.
상을 치우고 잠자리에 드는데 진희가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 깔고, 할머니 버선을 벗기는 일은 선희와 미희 담당이다. 오른쪽 버선은 선희, 왼쪽 버선은 미희가 버선 하나 싹을 들고 벗기는데 동생들이 애를 써도 벗겨지지 않는 날이 있다. 진희가 나선다. 버선이 물에 젖은 날이면 더 벗겨지지 않는데 그럴 땐 일어서서 온 힘으로 버선을 당겨 벗긴다. 할머니 버선이 벗겨져야 그제야 하루 일과가 끝난다. 안쪽 벽부터 할아버지, 진희, 선희, 미희, 영희, 할머니 여섯 명이 누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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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가 200평 시골집은 사람만 사는 게 아니었다. 소 대여섯 마리와 송아지, 토종닭, 오골계, 칠면조 등 조류도 키웠다. 마당 왼쪽에는 소 우리를 만들어 할아버지와 아빠가 소집을 청소하거나 여물을 먹였고 오른쪽에는 닭장을 만들어 할머니와 유치원생이었던 진희가 맡았다. 진희는 닭장에 들어가 달걀을 가져 나오기도 했고 닭들이 마시는 물을 갈아주거나 사료를 채워주는 일도 했다. 물통과 사료 통을 수돗가에서 씻는 일도 했다. 짚더미와 닭똥이 엉겨 붙은 바닥을 쓰레받기나 사까래로 긁어내는 닭장 청소는 할매가 대부분 했지만 진희도 옆에서 도왔다.
연탄집을 한 적도 있다. 마당 입구 남는 창고에 연탄을 쌓아 놓았고 리어카로 동네 배달을 다녔다. 삼촌과 고모 둘, 할머니의 일이었는데 진희도 종종 따라나섰다. 어른들은 연탄 두 개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짧고 넓은 집게를 양손에 집고 열심히 날랐고 진희는 연탄 하나만 들을 수 있는 자기 키 만한 기다란 집게를 두 손을 들고 낑낑대며 겨우 하나를 날랐다. 연탄을 떨어뜨리기도 했고 집게로 집으면서 망가뜨리는 일이 많았다. 성질머리 고약한 삼촌은 “야! 하지 마. 집에 드가있어!” 하며 진희 머리를 툭 쳤는데 진희 머리가 흔들릴 정도였다. 삼촌이 때리고 간 자국이 이마에 까만 연탄으로 선명하게 찍히기도 했다. 어른들의 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진희는 기다린 집게로 연탄 한 장을 들었고 떨어뜨리지 않으려 두 손으로 더 꾹 집게를 잡았다. 1년 2년이 지나면서 진희도 연탄배달이 능숙해졌고 제법 집안의 일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양갈래로 높이 땋은 머리에 노란 스웨터, 빨간 바지에 하얀 양말, 분홍 신발을 왼쪽 오른쪽 바꿔 신고 리어카 위에 올라 타 찍은 사진이 있다. 한창 연탄 배달을 할 때 찍은 사진이다. 얼굴과 사진 속 진희는 넘어지지 않으려 리어카 양 선반을 살짝 엎드려 잡고 있었고 두 볼과 코가 빨개진 얼굴을 살짝 들고는 즐겁다며 사진 속 진희는 웃고 있다. 할아버지 경운기를 타고 논밭으로 다닌 진희, 크고 낡은 자전거 안장에 앉아있는 진희,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도 돕는 고된 어린시절이었음에도 사진 속 진희는 늘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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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4학년 진희는 영애에게 “엄마, 나는 성공해야 하니까 서울로 이사 가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종 사촌이 서울 화곡동과 안양 인덕원에 살아 주말이나 방학에 자주 오갔다. 갈때마다 주변이 논밭이 시골집과 비교도 안되는 도시의 모습에 서울로 가야겠다 자주 생각했던 터였다. 영애는 어린 진희의 말을 허투로 듣지 않고 마음에 담아 몇 년 뒤 정말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서울로 전학을 온 건 진희가 중학교 1학년 때였고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빨리 취직을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작은 집에 많은 동생들, 집중해서 공부할 환경이 아니었다. 철 모르는 연년생 동생들은 집안에서 싸우며 떠들었고 그때마다 신경이 곤두섰고 예민해졌다. 조용히 하라고 동생들을 다그쳐도 소용없었다.
진희는 학교에서 오자마자 낮에 잠을 잤고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으로 생활패턴을 바꿔 우수한 학교성적을 유지해 갔다. 이후, 명문 기숙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매달 발생하는 기숙학교 비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영애는 진희의 뒷바라지를 했다. 진희는 기숙학교의 빽빽한 하루일과와 중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부량에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주말마다 집에 오는데 학교에 가기 싫다며 자주 울었다. 그런 진희가 애처로워 영애는 담임선생님에게 하루 이틀 있다가 학교를 보내겠다 전화를 하기도 했다.
진희가 다니는 기숙학교는 남녀공학 명문학교로 전교 석차는 1등부터 10등까지는 대부분 남자아이들 차지였다. 1학년 2학기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진희는 학교에 점차 적응을 했고 곧 전교 1등을 차지했다. 진희를 뒤이어 남자아이들이 석차가 줄을 이었다. 학교에서 진희에게 모든 관심이 쏟아졌다. 2학년도 마찬가지로 전교 1등을 내주지 않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이미 교장추천으로 갈 대학까지 정해져 있었다.
진희도 의대를 가고 싶었지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계산이 섰다. 고생하는 부모님과 줄줄이 딸린 동생들, 돈 들어갈 것이 한 두 푼이 아니라는 상황도 압박이 되었다. 학교에서 정해준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기보다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과 바로 취직이 되는 전공을 택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대학도 수석으로 졸업했다. 취직은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 두 곳 모두 합격이 되어 더 좋은 조건으로 골라 입사했다. 스물세 살에 입사해서 결혼하기 전까지 번 모든 돈은 동생들의 학업과 대학 등록금을 보탰고 가계에 필요한 전세자금도 보탰다. 진희가 회사에 들어가고 월급을 받으면서 영애의 가족도 조금 여유 있는 생활이 되었다.
스물여덟 결혼을 앞둔 진희는 그동안 번 돈과 모은 돈을 모두 가족을 위해 썼고 통장에 잔고 없이 결혼 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만난 준석과 7년 연애했고 오래 만난 만큼 진희는 준석의 부모님과도 오래 알았다. 준석의 부모님이 수원 신도시 아파트 전셋집을 마련해 주셨고 SUV 차도 사주셨다. 호텔업과 가구업을 하시는 준석의 새아버지 덕분에 진희와 준석의 신혼집은 침대 책상 서랍 할 것 없이 모두 크고 단단한 엔틱가구로 배치했고 TV, 냉장고, 에어컨 등 전자기기는 진희 회사 직원가로 구입했고 식구류들은 진희가 자취하면서 사용했던 식기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왔다.
수원에서 크고 유명한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진희의 지인과 회사 동료들이 많이 찾아왔고 친구 동료사진을 두 번이나 나눠 기념 촬영을 할 정도로 하객이 많았는데 그날 받은 축의금도 진희는 모두 엄마인 영애에게 주었다. 진희는 첫째로서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다 하고도 동생과 가족들을 생각하면 결혼하는 것이 미안해서 눈물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