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램핑을 다녀오고 이틀의 평일이 지났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미희와 정태는 소파에 앉아 각자 토마토 한 알을 들고 한입 두입 베어 먹으며 소화를 시킨다. 오늘 있었던 일이나 요즘 고민, 생각들을 이야 기 하는데 미희가 글램핑장에서 있었던 일을 먼저 꺼냈다.
“진희언니가 아빠한테 가방을 못 받은 게 내내 서운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엄마가 농사 지은 쌀이나 농작물, 반찬이나 김치, 각종 액기스를 때 마다 보내주시거든? 딸들 집 뿐 아니라 딸들 시댁에도 다 보내시는 거 알지? 엄마는 남에게 베풀면서 사는 게 삶의 즐거움 중에 하나니까. 진희 언니네도 김장김치도 보내준다고도 했고 보약이나 한약도 해준다고 했는데 언니가 다 안 받는다 그랬대. 그런 것도 딸에 대한 마음인데 왜 그런건 안 받는다고 하면서 부모님께 서운함은 있을까?”
미희가 토마토를 한입 베어 물고 손으로 즙이 흐르는 걸 테이블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닦으며 정태에게 물었다.
“시골에서 보내 주시는 거 좋긴 한데 2인 가족이 먹기에 김치나 반찬들이 너무 많아. 냉장고에 자리만 차지하고 시간 지나서 버리게 되기도 하고 우리도 종종 그러잖아. 누나네도 비슷할거야. 누나네 좋은 레스토랑도 자주 가고 반찬이나 과일은 시골에서 보내주는 것 보다 더 비싸고 좋은 거 먹을 걸?”
정태도 입안에 있는 토마토를 이리저리 씹고 삼키며 대답했고 말하다 보니 생각나는 것들이 있어 들고 있던 토마토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골 부모님이 주는 것과 누나가 받고 싶은 게 서로 다른 거 같아. 누나는 딸로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야. 여행 간 아빠에게서 선물 받는 딸. 시골 부모님은 누나를 딸 보다는 의지처로 많이 삼으시잖아. 정신적인 것 뿐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누나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농작물 액기스 그런 걸로 표현을 하시는데 그게 누나랑 안 맞는거지.”
정태는 내려놓은 토마토를 들고 다시 한입 베어 물으려다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내가 사람들을 가만히 이렇게 보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주고 싶은 걸 주고 나중에 자기가 받고 싶은 걸 요구하더라고. 어머님이 누나한테 이것저것 챙겨주지만 금전적인 부분에서 또 도움을 요구하시잖아.”
생각지도 못한 부모님 이야기에 미희는 고개를 돌려 한 마디 하려는데 정태가 곧바로 뒷 말을 이었다.
“시골 부모님에 대해서 안 좋게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사람이 원래 그래. 나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누구나 그런 면이 있다는 거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래. 줬으니 받고 싶고 받았으니 안 줄 수 없고. 무조건 주기만 하는 건 거의 없다고 생각해. 물질이나 돈을 주고 받는 것 뿐 아니라 정신적이든 뭐든. 계속 주기만 하면 사람이 지치지. 부모 자식 사이에도, 부부사이에도, 사람 관계는 어떤 면에서는 진짜 기브 앤 테이크인 것 같아. 세상에 공짜 없다, 나는 이 말도 정말 명언이라 생각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정태의 냉정한 평가나 객관적 사실에 미희는 처음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영애는 네자매에게 인생에 감사할 것 밖에 없다, 얼마나 행복하느냐, 가족끼리 우애있게 살고 서로 도우며 살아라.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라, 했다. 자식들에게 강요한 게 아니라 영애 자신의 인생이 정말로 감사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고 행복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미희는 영애의 말을 듣고 영애의 인생을 보면서 비슷한 인생관으로 살았다. 삶을 그림으로 비유하면 미희는 명도 채도가 밝은 빨주노초 알록달록 그림, 정태는 회색과 검은색이 대부분인 그림 같다. 미희는 어두운 색 크레파스가 새것으로 남아있고 정태는 밝은 색 크레파스가 새것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삶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모두 존재한다. 미희는 정태의 그림을 보면서 지금까지 써보지 않았던 색깔이 조금씩 칠해진다.
“어머님과 진희누나가 지금은 서로 원하는 걸 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아. 진희누나는 침해받지 않고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누나가 어떤 면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너도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좀 두면 좋겠어.”
‘인생의 크레파스’를 혼자 생각하고 있던 미희가 정태의 대화로 다시 돌아왔다.
*
미희도 친구들을 만나면 밥이나 커피를 습관처럼 사곤 했다. 미희가 한 두 번 밥이나 커피를 사는데 두 세 번의 비용지출 이후에도 당연하게 미희가 사는 걸로 아는 친구들이 몇 있었다. 미희는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몇 달에 한 번, 큰 비용도 아니니 굳이 따지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같이 살았던 영희도 ‘미희언니는 카페에서만 남들 사주느라 한달 용돈을 다 쓴다’며 못마땅해 했고 연애 하면서 지켜보던 정태도 ‘너 주변에 적당히 이용하는 사람들만 있고 진짜 너를 위하는 사람은 없다. 나한테는 너가 너무 소중한데 남들은 아무나 밟을 수 있는 카펫처럼 너를 이용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상황 판단보다는 사람과의 관계 자체를 더 좋아했던 미희는 영희와 정태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당연하게 반복해서 지출되는 비용에 미희도 어느 때는 친구들을 덜 만나게 되고 안 만나게 되었다. 주고 받는게 서로 좋은 관계만 몇 남게 되었는데 밥이나 커피를 사는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만남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으로 줄 수 있는 관계만 남았다.
관계에 있어서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던 미희는 결혼 후 정태 핑계를 대며 지인과의 관계를 미루거나 거절했고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미희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 한 적도 있었다. 대학교 때 여자 선배는 몰아붙이는 말로 다그치며, 때로는 다양한 미사어구로 미희의 기분을 좋게해서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려고도 했고 회사 동생은 ‘언니언니’하며 늘 미희 두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떨면서 며칠 못 봐 보고 싶다며 주말에 만나자 꼭 만나자하며 정작 일정과 시간을 정하지는 않는다. 이번에 여행가면 ‘언니 선물 이만큼 사올게’라며 하지만 정작 선물은 없고 여행지에서 힘들었던 일들만 내내 미희에게 털어놓았다. 당시에는 못 느낀 감정들이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니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그럼 누구 만나서 놀아? 결혼 전에 지네 다리였는데 요즘은 그래도 곤충다리 정도 됐어. 만나는 사람이 6명도 안 될걸?”
“미희야, 그 다리도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날아다닐 수 있어. 날개가 있는데 왜 기어 다녀? 미희 너도 날아다녀, 기어다니는 사람 말고, 날아다니는 사람들 만나."
말이 뾰족하고 날이 서있어 아플 때도 있지만 미희를 향한 애정을 담아 하는 조언이다.
*
토마토를 다 먹은 정태는 손과 입을 씻으려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고 소파에 앉아 아직 한입 밖에 안 먹은 토마토를 들고는 미희는 생각에 잠겼다. 주방으로 가던 정태가 돌아와방문으로 얼굴만 내밀고 못 다한 말을 한다.
“아 진희누나, 그렇다고 진희누나가 가족들에게 안 하는 거 아니다? 부모님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다 해드리지 않아? 핸드폰이나 가전제품 사드리지. 아버님이랑 어머님 두 분 마사지샵도 매주 끊어드리잖아. 마사지샵이 한 달에 60만원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주방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는 정태의 목소리만 방 안에서 들린다. 미희 대답이 없자. 정태는 방문으로 와서 마저 묻는다.
“맞지? 60만원? 그리고 하준이 하은이 겨울옷이 더 비싸다고 매년 겨울 옷 사주잖아. 그것도 잠바랑 신발이랑 다 합치면 50만원 넘을걸?”
그래도 미희가 아무 말이 없자 정태는 일주일 동안 먹어야할 토마토 스무 알을 씻으러 주방 싱크대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