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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가 떠났다

by 혜화동오로라


인천공항, 진희와 준석은 라운지에서 디저트와 커피를 마시며 비행시간을 기다렸다.


경유하고 대기 또 경유하고 대기하는 30시간 비행, 이틀에 걸려 가야 하는 먼 나라. 비행에 대한 설렘이나 다른 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보다 진희는 긴 비행의 시작에 벌써부터 지쳐 있었다. 남미에 가서도 업무뿐 아니라 생활하는 것들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 계속 신경이 곤두서있다.


준석과 마주 앉은 테이블에 진희는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고 일단 쉬기로 한다. 준석은 진희가 좋아할 만한 과일과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들고 왔다.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니 진희도 금방 기분이 나아졌고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끝낸 거라며 준석의 응원에 힘이 나기도 했다. 30분 정도 여유 시간을 보내고 비행기 입장시간이라는 준석의 말에 두 사람은 짐을 챙겨 일어났다.


연차와 비행 거리에 따라 좌석이 달라진다. 10년 차가 훌쩍 넘은 진희는 남미 출장 때부터 비즈니스 석을 지원받았다. 준석은 지원이 되지 않아 사비로 진희 바로 옆 자리로 티켓을 끊었다. 두 사람은 승무원이 안내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진희는 창가자리였고 준비된 어메니티 중 대부분 실내화와 담요 정도만 이용한다. 진희는 영희에게 선물 받은 나이키 운동화를 벗어 실내화로 갈아 신은 뒤 운동화를 한쪽으로 가지런히 놓았다.


신발을 보며 영희가 쓴 편지의 단어들이 생각났다. ‘가족’, ‘힘과 위로’,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막내 특유의 애정표현이 느껴졌고, 으레 쓰는 표현들이지만 진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진희는 가족에게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한 적은 없다. 가족이 나에게 짐이나 상처라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못하고 늘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말한 적 없지만 모두 알고 있다. 착한 준석과 결혼한 이유도,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하는 이유도, 야근과 과도한 업무량에도 이를 물고 회사에 붙어있는 이유도.


열넷, 중학생부터 혼자 방을 썼고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 기숙사생활을 했다. 회사에서의 잦은 출장과 주재원의 삶까지. 돌이켜보니 진희는 계속 가족을 떠나왔다. 돌이켜 보면 진희가 떠났던 이유는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였고 돈을 많이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떠날수록 가족에 대한 마음은 진희 자신도 모르게 더 움켜쥐어졌다. 그런데 막내가 말한다. 이제는 언니 자신을 위해 꽃길만 걸으라고. 진희는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날이 유난히 화창하다. 평소 같으면 비행기 창을 닫고 의자를 뒤로 젖혀 긴 비행에 지칠 몸을 위해 미리 휴식을 취하지만 진희는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들어오는 햇살에는 눈을 감고 느껴본다. 곧 이륙할 거라는 안내방송에 들숨과 날숨을 크게 한번 쉬고 편안히 미소가 지어졌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금방 하늘로 날아올랐다.


진희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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