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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Oct 17. 2020

(일상) ​나는 꽝이었다

나는 10만 원짜리? 30만 원짜리?


2020.10. 16.   10만 원짜리? 30만 원짜리?


"어머니, 오늘 동기 모임이 있어서 저녁 먹고 갈게요. 좀 늦을 것 같아요"
"그래. 너무 많이 늦지 말고, 조심해서 와"

아들 녀석한테서 카톡이 왔다. 적당히 마시고 들어오겠지 싶어서 기다리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잠이 깨서 시계를 보니 1시를 넘어서는데 혹시나 싶어 건넛방을 둘러보니 아들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야? 많이 늦네?"
"녜. 지금 들어가고 있어요"

오고 있다는 문자를 보고서야 마음이 놓여 다시 잠을 청했다. 평생 남편 술바라지 하다가 이제 좀 끝나나 싶었는데, 이젠 아들 술바라지를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결에 스쳐 지난다.




남편은 술꾼이었다.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다 보니 술자리를 좋아하고 술을 마셔도 끝까지 남아 설거지를 다 끝내고서야 돌아온다.

"저녁 먹고 갈게"

하면 다음 날 새벽 서 너 시가 기본이고, 조금 이르면 한 두시, 열두 시에 들어오면 조퇴 수준이다. 결혼 초반에는 몇 번 이야기를 했었지만, 말할 때뿐이고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속 끓이고 싶지 않아 포기하고 살았다.

어느 날 새벽, 그날도 얼큰하게 술에 취한 남편은 비틀비틀 갈지자걸음으로 들어왔다. 대충 옷을 벗고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그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뭐라 뭐라고 한다. 알싸한 소주 냄새가 향긋하게 난다.

가끔 적당히 술이 취해 오는 남편한테서 나는 소주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술이라고는 입에도 못 대는데  술 취한 남편에게서 나는 소주 냄새는 한 번 정제(?)되어 올라오는 건지 이따금 신랑한테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소주냄새를 맡기도 한다.

그럴 때면 섹시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조선시대 남자가 왠지 섹시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나도 참 속도 없다' 술만 마셨다 하면 허구한 날 새벽이 되어야 들어오는 남편을 닦아세워도 모자랄 판에 섹시하다고 생각하니 참 어이가 없다.



그날따라 무슨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술냄새 폴폴 풍기는 인사불성인 남편 얼굴에다 대고 말했다.

"어머!, 이사장니~~~~임!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늘은 십만 원짜리로 해드릴까요? 삼십만 원짜리로 해드릴까요?

불을 다 끈 어두운 방에서 평소 안 쓰던 비음을 적당히 섞어가며 나름 철저하게 신분 세탁을 했다고 생각했다. 밤 문화의 시세를 모르니 내가 적당한 가격을 제시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편의 집 밖의 생활이 어떤지도 알 겸, 밑져봐야 최저 가격인 십만 원은 건질 수 있겠다 싶었다. 카드로 결제하겠다고 하면 현금만 된다고 단호하게 말해야지 하며 남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 사람이!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헉!.........'

술이 떡이 되어 갈지자로 들어온 사람이 내 목소리는 기똥차게 알아차린다.

"난 줄 어떻게 알았어?"
"아, 그럼 마누라 목소리를 몰라?"

'콧소리가 좀 더 들어갔어야 했나? 아님 너무 들어갔나?'

불도 다 끈 어두운 밤인데 어떻게 나를 알았지? 실패 원인을 분석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남자들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정신을 잃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정신이 번쩍 드는 족속인가 보다. 인사불성인 상태에서도 어쩜 그렇게 본처 목소리는 귀신 같이 알아듣는지......

그날 나는 삼십만 원짜리도, 십만 원짜리도 아닌 꽝이었다.




술자리를 빠지면 나라라도 망하는 줄 알고 나라를 지키듯 한결 같이 새벽을 지키던 사람이 세월이 가면서 술 앞에 장사 없다더니 언제부턴가 귀가 시간이 점차 빨라졌다. 열 시에도 들어오고 심지어 저녁 반주만 하고 여덟 시에도 온다. 그러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그건 그것대로 또 기분이 별로다.


가끔 새벽을 지키던 그 때의 늠름한(?) 남편이 그립다.


내 변덕도 죽 끓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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