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노에서 밤 버스를 타고 쿠스코에 도착했다. 거의 170도 가까이 뒤로 젖혀지는 침대버스라고는 하지만 장시간 야간 버스를 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다른 승객들이 잠을 자고 있어서 화장실 가기도 쉽지 않았다.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곧바로 오얀따이땀보로 가야 한다. 도착한 쿠스코 버스 터미널 밖은 아직도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터미널을 빠져나오자 승객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 기사들의 영업이 치열하다. 이른 새벽부터 삶은 뜨겁다.
그중에 가장 인상이 선해 보이는 기사를 선택해서 오얀따이땀보로 향했다. 택시는 사방이 깜깜한 쿠스코 골목 여기저기를 훑으며 빠져 나가는데 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스친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여차하면 둘이서 확 뜯어놓으면 되겠지? 그래도 여자 둘이서 남자 하나는 감당할 수 있을 거야......'
택시기사의 체구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아 승산이 있어보였다. 나의 유혹을 믿고 넘어와 준 동기가 제일 고마운 순간이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이 시각에 절대 택시를 타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터미널에서 돌돌 떨면서 해가 밝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는 동안 일부러 기사에게 말을 시켰다. 그는 영어를 하지 못해 쑥스러워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어 한두 개라도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를 썼다. 주로 페루 여행과 가족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뜨고 오얀따이땀보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밝은 곳에서 본 기사의 얼굴은 영락없이 순박한 애 아버지였다. 오는 동안 예비 강도(?)쯤으로 여긴 것이 미안했다.
오얀따이땀보는 조용하고 자그마한 동네다. 그곳은 마추픽추로 가는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 모이는 것이 주요 사명이다. 쿠스코에서 이 곳 외에 몇 곳을 더 묶어 일일투어로 많이 오기는 하지만 관광을 위해 묵기보다는 마추픽추를 위한 목적이 더 큰 것 같다.
숙소에 가방을 던져놓자마자 야간 버스에 시달린 피로가 쏟아져서 두툼한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가 미룬 잠을 잠시 잤다. 한두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 메인 광장으로 나가보았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광장 근처에 작은 시장이 있다. 이 곳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감자를 먹었다. 페루가 고산지대다 보니 감자가 엄청 맛있다. 평소 감자나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도 페루의 감자는 단 번에 반하게 만든다.
시장 입구에 매일 감자를 팔러 나오는 아주머니가 있다. 한국 돈 500원에 감자 두쪽과 계란 반쪽을 종이컵에 담아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컵만 시켜서 둘이 나눠먹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오다가다 눈에 띄기만 하면 사 먹었다. 그조차 시간이 조금 늦으면 일찌감치 다 팔리고 없다.
시장 안을 둘러보다가 구석진 곳에 생과일 주스를 파는 가게가 있다. 파인애플 주스를 시켰는데 3,000원에 이렇게나 많이 갈아준다. 설탕을 넣지 않았는데도 새콤달콤한 주스가 엄청 맛있어서 주스로 배를 채우고 나왔다.
아이를 업고 있는 주인은 가게를 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원래 수줍음이 많은 건지, 능숙한 손놀림에 비해 오래된 상인의 기름진 응대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집에 온 손님을 접대하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그녀의 몸짓에서 삐져나온다. 등에 업힌 아기도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울지도 않고 새까만 눈만 요리조리 굴리며 업혀 있다.
작은 마을이기는 하지만 볕도 좋고 시간 여유가 있어 여기저기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아기를 데리고 물건을 팔러 온 엄마는 가게의 돌바닥에 아이를 앉혀놓고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 제 몸만 한 인형을 데리고 엄마의 사정을 아는지 얌전하게 앉아서 혼자 잘도 논다.
따뜻한 햇볕에 온몸을 다 내어놓고 늘어지게 오수를 즐기는 팔자 좋은 강아지들이 오얀따이땀보만큼이나 한가롭다. 아무리 좋은 빛도 저 짧은 다리는 늘리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의 머리를 양갈래로 가지런하게 묶어준 엄마의 야무진 손길이 느껴진다. 그만큼이나 암팡진 아이의 눈빛도 똘망똘망하다. 저 아이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 내 눈에 비치는 페루만큼 아이 눈에도 세상은 신기하게 보이는지?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도 햇살은 그득하다. 얼기설기 돌과 흙으로 빚어 만든 울타리를 뚫고 목이 긴 기린처럼 얼굴을 내민 선인장 크기에 아연실색했다. 화분에 심은 고만고만한 선인장만 보던 촌년은 저게 선인장이 맞나 싶어 보고 또 보고, 암만 봐도 선인장인 게 신기하다.
허름하기는 해도 작은 카페들이 아기자기하게 늘어서 있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정감이 가는 가게들이다. 이름난 관광지보다 오히려 동네 구경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마추픽추를 보고 나서 쿠스코로 돌아간 뒤 친체로 등을 끼워 일일투어를 하면서 다시 이 곳을 찾았다. 한 번 머물렀던 곳이라 그런지 두 번째 왔을 때는 한층 익숙하다.
마을에서만 볼 때는 미처 몰랐던 웅장한 규모에 놀랐다. 잉카시대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미스터리 한 지역이라고 한다. 산 중턱에는 물건을 보관했던 자리라고 하는데 멀리 있어서 직접 가 보지는 못했다. 가이드로부터 설명을 들으면서 둘러보니 훨씬 의미가 깊다.
높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앉은 이 곳은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지어 올린 돌계단과 마치 도시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집들이 질서 정연하게 길을 따라 들어서 있다.
자연과 신을 숭배하는 그들의 마음이 거대한 돌계단을 따라 하늘에 닿을 듯하다. 산을 따라 걸어본다. 구석구석 사람들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남미의 매력 중에 하나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압도하는 자연이다. 그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겠지만 저 웅장한 자연을 대하면 절로 그런 마음이 들 것 같다. 다 돌고 내려와 다시 보아도 거대한 돌계단의 위엄은 층계마다 세월이 무색하도록 선연하다.
출구로 나와 돌아보니 돌계단 위로 앉은 하얀 구름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다. 페루 어딜 가나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구름이 걸려있다. 손을 뻗으면 한 움큼 쥐어질 것 같다.
페루에 와서야 오랫동안 파란 하늘을 잊고 살았던 것을 알았다. 고개를 뒤로 젖혀 눈에 파란 하늘을 담고 한동안 하늘에 강강술래를 그렸다. 오얀따이땀보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