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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ug 03. 2022

맥주엔 주부 9단, 소주엔 해물 누룽지!

<나는 내가 좋고, 싫고, 이상하고 >

아이들이 잠든 밤, 방학중이라 더없이 꿀맛 같은  열한 시가 되면 자연스럽게 냉장고 문을 열게 된다. 냉장고 제일 위칸에서 쪼르륵 줄을 맞춰 나를 기다리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기 위해서다. 특별히 맥주가 먹고 싶어서라기 보단, 캔 하나와 유리컵 하나를 달랑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0.3초의 시간이 좋아서다. 작은 스탠드 하나만 켜 둔 어두운 방, 읽고 싶은 책들을 잔뜩 쌓아놓은 나만의 책상으로 갈 때 손에 들린 맥주는 “지금부턴 온전히 너만의 시간이야”라고 말해주는 일종의 선언 같은 거다. 꼭 안아주고 싶은 기분 좋은 선언.

     

목적은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익숙한 풍경에 나를 던져두는 거라 예쁜 컵이나 그럴싸한 안주 같은 것은 필요 없다. 그나마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유리로 된 투명한 컵을 선택해서 들고 오는 게 전부다. 일렁이는 황금빛깔 위로 하얗게 내려앉은 통통한 거품, 그 오묘한 맥주의 실루엣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꺼내고,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아, 캔을 따고, 컵에 따르는 일련의 행동만으로 마음은 한결 편안해진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서, 대체 나란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리 궁리를 해도 떠오르지 않아 괴로웠던 적이 있다. 그때 내 얘기를 듣던 친구가 말했다. “취향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일상을 잘 살펴보면 분명 너만의 취향이 있을 거야. 그걸 보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그랬다. 막연하게 좋고 싫음에 대해 생각하려 했을 땐 떠오르지 않던 것들이 일상의 곳곳에 숨어 나를 말해주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나는 거의 10년째 같은 브랜드의 화장품만 쓴다. 옷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정해두고 늘 그곳에서만 옷을 산다. 내가 사들이는 옷의 종류도 매우 한정적이다. 청바지와 티셔츠 딱 두 개. 아주 가끔 원피스나 치마 같은 것을 사 보지만 결국엔 입지 않고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만다. 늘 같은 제품의 바디로션만 쓰고, 커피도 먹던 곳에서만 먹는다. 식당이나 술집도 가던 곳만 간다. 아무리 맛집이라고 해도 내가 먼저 찾아가지 않는다. 사람 사귀는 것에도 취미가 없어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집착하는 편이다. 소설이나 영화의 취향도 확고해서 현실에서 크게 벗어난 것들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판타지나 공상과학 같은 건 아예 적응 불가 영역이다.    

  

일상을 살펴보니 정말로 내가 보였다. 새로움보단 익숙함을 좋아하고, 예민할 정도로 낯선 것들을 경계하는 사람. 같이 먹는 밥도 좋지만 혼자 먹는 밥을 더 좋아하는 사람. 맥주엔 주부 9단, 소주엔 해물 누룽지를 외치는 사람. 여름에도 바디로션을 떡칠하는 사람. 머리는 언제나 젖은 채로 묶어 버리고, 넷플릭스는 1.25배로 봐야 하는 성질 급한 사람. 낯가림이 심해 미리 벽치는 사람 등등.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나는 참, 재미없고, 각박하고,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사람 같기도 하다.      




익숙한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들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특별한 이유 없이 반복되는 삶의 패턴들이 좋고, 너무 익숙한 나머지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나만의 버릇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에도 즐거움을 느낀다. 그것이 낯선 공간 안에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이상한 행동이라도 ‘맞다, 나는 이런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면, 우습게도 그런 것들이 '나'를 확인시켜 주는 것만 같다.


존재하는 나, 살아있는 나를.


맥주를 마실 때면 전자레인지에 정확히 25초를 돌려 먹는 주부 9단 소시지를 우걱우걱 씹어먹으면서도 나는, 나를 확인하고 안도한다. 참 이상하지만 진실로 그러하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들이 잠든 밤, 반 밖에 먹지 않고 버리는 맥주를 굳이 방으로 들고 와 정확히 반잔을 먹고는 이렇게 우스운 글을 쓴다. 오늘도 ‘나’로 존재하는 ‘나’를 확인하면서.      


백은선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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