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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Nov 16. 2019

울음을 삼키는 사람_2

마지막 밤


그날 밤은 비가 정말 많이 왔다. 어쩜 마지막 날에 이렇게 쏟아지나, 내일 비행기는 뜰 수 있을까. 이 와중에 내 옆에서 잠이 든 엄마의 숨소리는 왜 저리 슬픈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조용히 삼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라디오를 들으며 누워있었다. 배가 자꾸 아팠다. 저녁에 욕심내고 회를 먹어서 그게 탈이 났을까. 그럴 수 있을 거야. 난 인생이 조금 시트콤 같은 편이니 출국 5시간 전 식중독 같은 건 클리셰 아니겠어. 부스스한 눈으로 화장실에 갔더니 피가 비친다. 생리라니. 꼼꼼하게 짐을 싸서 차에 미리 실어두고 수중에는 딱 바셀린과 칫솔, 휴대폰만을 남겨둔 이 시점에 나의 몸은 짓궂게도 시간의 흐름을 딱딱 가리키고 있었다. 세 번째 생리, 90여 일의 시간, 엄마 집에서 나의 집으로 갈 시간. 


새벽 3시 10분 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말똥말똥 못 자고 있었으니 피곤이랄 것도 없었다. 내 옆에 누워있던 엄마도 나와 같았을까. 나를 향해 어둠 속에서 “아직 3시 안됐어” 하고 애절하게 속삭였다. 나는 화장실에 가 이를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3개월 마다는 바꿔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여전히 꽂혀있는 엄마의 삐쭉삐쭉한 칫솔, 아빠의 염색약, 유통기한이 지난 바디워시, 공사 미완으로 밑으로 질질 새는 세면대... 나는 의식적으로 슬퍼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슬펐다. 자꾸 엄마 아빠의 늙어감이 서럽고 불안했다. 그들의 피곤함과 귀찮음으로 유기된 삶이 자꾸 ‘나이 듦’과 동의어 같아서, 머무는 동안 자꾸 그들에게 면박을 줬다. 삶을 더 활기 있게, 정성 들여 가꾸라고 채근질을 했다. 


좋아하는 작가가 엄마에 대한 글을 쓸 때, 엄마라는 호칭 대신 실명을 쓰면 상당히 다른 느낌의 문장이 나온다고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의 삶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나는 슬펐다. 진희와 근상이 돌봄의 주체에서 돌봄의 대상으로 천천히 바뀌는 과정이 슬펐고, 그 과정에서 내가 없어서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진희와 근상이 정말 내 돌봄이 필요한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며 산다. 그렇다면 나의 이 감정은 뭘까. 인터넷 뱅킹이 어렵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종이통장을 들고 은행을 향하는 진희를 보면 괜히 서러웠다. 서울 병원에 갈 때마다 지하철 타는 게 어려워서 그 먼 거리를 택시를 잡아타는 진희를 상상하면 먹먹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한다고 믿고 안쓰러워하는 것, 그냥 ‘가족’이라고 하면 되나.  


나는 현관 앞에서 진희와 헤어졌다. 나는 눈물을 꿀꺽 삼키고 그녀를 한 번 안으며 ‘도착하면 전화할게. 얼른 자. 내일 일찍 병원 가야 한다며.’ 하고 말했다. 나는 버스터미널로 데려다주는 근상의 차 안에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흘러나왔다.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람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고속버스 정류장에는 공항으로 향하는 들뜬 여행객들로 나름 활기찬 기운이 흘렀다. 그들 가운데 근상과 나 둘만 별말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익숙한 이별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전부 잔소리 뿐이어서 나는 입을 닫았고, 근상은 원래 감정의 푸닥거리가 요란하지 않은 사람이라 묵묵했다.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 우리는 운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건강을 잘 챙기라는 말없이 서로 '들어가', '응, 들어가.'를 탁구 치듯이 주고 받았다. 버스 기사가 시동을 걸로 버스 안 실내등을 끄고, 컴컴한 새벽 터미널을 빠져 나갈 때까지 근상은 손을 흔들었다. 흥에 겨워 잠 못 이루며 수다떠는 여행객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조금 울다 잠들었다.  

다음번에 진희와 근상을 만날 때 나는 조금 더 늙어감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서러워하지 않고 죄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울음을 삼키는 대신 이별이 아쉽다고 얼싸안고 엉엉 우는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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