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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Mar 08. 2019

바다 무덤

단상 2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 2차선 도로가 있다. 그 차도를 건너면 갤러리가 나온다.

갤러리의 큼지막한 유리창에는 항상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그린 유화가 전시되어 있다.

갤러리를 지나치면 왼쪽으로 내리막길이 있다.

그 내리막길의 인도는 아주 좁은데, 그나마도 꽃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지 오래다.

차가 자주 다니지 않으므로 그냥 차도로 걷는다. 양측으로 히비스커스와 플루메리아가 서로 질세라 자란 

그 거리를 2분 정도 걸어 길의 마침점에 다다른다. 길이 끝나는 곳에 앉아 바다를 만난다. 


총 소요시간은 4분 26초. 4분 26초 전에 하얀 페인트 벽의 아파트에 있던 나는, 이제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이 곳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얼추보면 기세 좋은 산을 휘어 감고 넘실대는 푸른 너울이 화려하지만,

몸을 뉘일만한 모래사장도 없고, 파도는 사납고 물속은 모난 돌 투성이다.

얄궂게도 나 같다.

초대도 안 했는데 나비처럼 훨훨 날아들더니 손을 휘휘 저어 내치기도 전에

아, 가짜 꽃이네 하고 떠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 곳에 파묻어 놓은 나의 민낯은 외로움이다. 세상이 워낙 막막하여 울음을 토해놓고 가기도 했고,

아비의 나무껍질같이 거칠고 두툼한 손등이 눈에 걸리는 날엔 그리움을 넌지시 그물마냥 던지고 돌아갔다.

남들이 바삐 삶을 살아내는 순간에도 홀로 소외된 채 쨍한 햇볕 아래 담배연기도 흩뿌려 놓았다. 


재밌는 건 이 불친절한 해변에 단 한 번도 나 혼자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눈물 구름을 몰고 온 날에도, 그리움을 등에 지고 온 날에도

꼭 누군가 한 명쯤 바다와 마주한 바위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고된가를 뽐내며 살던 4월 어느 날, 그 바닷가에 갔더니 누가 불을 피우고 있다. 

행색이 남루하다. 긴 머리는 덥수룩하고 발은 맨발인데 가만 보니 내 또래 정도의 얼굴이다.

나무 그늘 아래 그의 짐으로 보이는 낡은 가방엔 물병, 냄비, 종이봉투가 닥치는 대로 담겨있다.

무슨 사연일까 궁금하지만 밝은 목소리를 쥐어 짤만큼 궁금하진 않다.

그는 내게 눈인사를 건넨 후 다시 불씨를 살리는데 집중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은 거셌고 그의 작은 불길은 한없이 작았는데도 그는 멈추질 않았다.

흙바닥에도 엎드렸다가, 찢어진 박스 조각을 불쏘시개 삼아 쑤셨다가 열심이다.

나는 집에서 가져간 커피를 마시며 그를 한참 지켜봤다. 


내가 떠난 후로도 파도는 쳤을 것이고 그는 불씨를 후후 불었을 것이다. 



Life goes on.

그것이 그도, 나도, 그 곳의 바위에 앉아있던 누구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룰이다. 

그곳에 온 모두가 아마 같은 목적이다.

해소되지 않는 잉여의 감정을 거친 파도 밑으로 묻기.

파도가 그 감정을 집어삼키고 난 후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내기.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 어른의 감정. 나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의 외로움을 

그 곳에 묻고 와 다시 일상의 절차를 충실히 따른다.

음식을 해 먹고, 낯선 언어를 공부하고, 모임에 가서 웃고-




내가 사는 곳에서 4분 26초 거리에 감정의 공동묘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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