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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Dec 30. 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Nevertheless


우리 모두 그런 친구가 하나쯤 있지 않은가. 이 남자랑 더 이상 못 만나겠다고 술잔 앞에서 신세한탄을 하다가도 다다음날 즈음 그 남자랑 희희덕거리는 사진을 올리는 친구. 그 남자는 영 아닌 거 같다는 주변의 만류를 무시하고 기어코 결혼해서는 매일 지지고 볶는 이야기를 늘어놓아 주변 사람에게 고구마를 먹이는 친구. 남친의 무심함에 하도 속상해 하기에 편을 들어준답시고 같이 욕해줬더니 ‘그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하고 방금 전까지 죽일 놈이던 남자를 두둔하는 친구. 우리 모두 그런 친구가 있고, 그런 친구가 되기도 하지 않은가.


그와 같이 한집에 산 세월만 계산해보니 6년이 넘는다. 아직 풋풋하고 싱그러울 때구나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쪽에선 나름 사활을 건 생활을 해왔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이야기는 더욱 유난스럽고 특별하기 마련이다. 사람 사는 게 고만고만하다가도 똑같이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각자가 각자의 이야기를 짊어지고, 살아내야 하는 순간을 살아낸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시작한 타지 살이었다. 그와 사는 동안 속이 상해 혼자 길에서 주저앉아 운 적도 있고, 그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응지의 자아를 어루만지며 낯설어하기도 했다. 현실에 부대끼며 지친 날들이 행복했던 날들보다 존재감이 커지면 자꾸 그를 탓했다. 그 같은 사람을 만나 참 많이 배우고 많이 성숙해졌구나 감사하기도 했고, 아침 해에 반짝반짝 일렁이는 윤슬을 보려고 커피를 들고 여유롭게 길을 나설 적엔 이런 삶도 좋구나 마음이 도타웠다. 어떤 날은 그가 짠했고, 어떤 날은 정말 쥐어박고 싶었고, 어떤 날은 남보다 못했다가 어떤 날은 감사했다. 부모보다 더 의존할 적도 있었고 그러다가 죽이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그에게 언젠가 이런 지독한 양가감정에 대해 묻자 그는 그저 ‘양가감정은 당연한 거야, 인간에겐’ 하고 말해 날 놀라게 했다.

그렇게 폭풍 같은 순간들을 흘려보내며 같이 살고 있다. 다음 폭풍을 기다리며. 그러고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치환되지 않을까.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을 섞고 산다. 콧등을 주먹으로 치고 싶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지어먹는다. 죽이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함께다. 날 이렇게나 서운하고 슬프게 만들어 복수하려고 별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슬퍼하면 마음이 욱신욱신했다.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을 깨달은 것을 그를 떠나기 위해 편지를 쓸 적이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어둑한 주방에 앉아 퉁퉁 부은 눈을 끔뻑이며 그 편지를 썼다.
너를 떠나야만 하는 이유, 이 상황이 객관적으로 우리 둘 다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이유, 내가 이 곳에서 자꾸 희생양처럼 구는 이유,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겐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생활, 그 모든 것을 적고 나는 아침까지 기다렸다. 잠도 덜 깬 그에게 편지를 읽어줬다. 그리고 나는 그의 더벅머리를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줬다. 네모나게 접힌 편지는 일기장 틈으로 사라졌고, 우린 같이 커피를 마셨다. 그를 떠나야만 하는 그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든 전제조건, 배경 상황이 무력화되는 감정. 아이러니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감정.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다가도 모두 설명이 되는 감정. 나를 자꾸 다단 복잡한 인간으로 만들어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게 하는 감정. 사랑이다.

아홉 번째로 함께 보내는 그의 생일, 그에게 이 글을 바친다.
Nevertheless,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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