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고리짝적 속담이 여전히 통하는 사람은 나의 아빠 근상이다. 카**톡, 페**북, ***그램, 하다 못해 이메일로도 세상 누구와도 재깍재깍 안부를 주고받는 2020년에도 근상과 나의 의사소통은 90년대 초 정도의 속도에 머물러 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건 1년에 손에 꼽을 정도. 물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와 통화를 하는 엄마를 통해 서로의 안녕을 전해 듣긴 하지만 서로 따로 연락을 하거나 안부를 묻지 않는다. 사이가 안 좋거나 어색한 건 아니고 그냥 그런 부녀다. 만나면 근상은 내 종아리를 주물러주고 나는 족집게로 근상의 등에 난 털을 뽑아주지만 몸이 멀어지면 자연스레 서로의 안녕을 바라고 믿으며 각자 살아가는 사이. 그런 근상의 이름이 휴대전화 화면에 떴을 때 순간적으로 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시국이 시국인만큼 뜬금없는 그의 연락에, 혹시 그가 아픈 건가?라는 질문이 제일 먼저 머리를 스쳤다. 전화를 받자 그는 마치 아침에 보고 나온 사이인 양 인사도 생략하고는, '아빠 이메일 비밀번호가 뭐지?' 물었다. 나는 근 몇 개월 만에 통화하는 딸에게 인사를 생략하는 그의 쿨함에 한 번,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의 프라이빗한 정보를 묻는 안일함에 두 번 놀랐다.
"아빠 이메일 비밀번호를 내가 어떻게 알아?" 묻자, 그는 나의 머릿속 구석에 콕 박혀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네가 만들어준 비밀번호잖아."
그렇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 근상은 지금처럼 이메일 비밀번호를 잊어버렸고 마침 한국에 있던 나는 직접 '비밀번호 찾기'를 통해 새 비밀번호를 만들어줬던 것이다. 근상이 몰랐던 사실이라면 젊은 현대인에겐 기억해야 할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최소 8-9개쯤 된다는 것과 나는 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관리하는 것조차 벅차서 자주 잊어버리는 사람이라는 점, 그렇기에 먼 옛날 그에게 만들어준 비밀번호는 당연히 기억 속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근상은 혼자 '비밀번호 찾기'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미로를 헤쳐나갈 운명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그와 나의 대화다.
-아빠, 그 아이디랑 비밀번호 쓰는 데 옆이나 아래쪽에 '비밀번호 찾기'라고 있지? 그거 눌러봐. -아이디 치고 눌러? -어? 아니 아니~ 그냥 비밀번호 찾기 일단 눌러봐. -눌렀어. -아빠 아이디 치라고 나오지? 아이디 쳐서 눌러봐.
타닥타닥.
-잘못된 아이디라는데? -음.. 아빠 골뱅이 전까지만 쳐야 돼. 골뱅이 알지? 동그라미 안에 소문자 에이 들어가 있는 거. -아아~ 골뱅이 전까지만 치라고... 케이.. 에스....
타닥타닥. -성함.. 여기에는 내 이름 쓰면 되지, 자판으로? -그렇지. 키보드로 아빠 이름 써 봐. -한글로? -당연한 거 아냐? -치니까 연락 가능한 연락처... 에이씨... 이게 뭐야... 여기 무슨 번호가 있고... 이게 뭐야..
근상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왠지 조급해져 후다닥 설명을 덧붙였다.
-어, 그건 아빠 휴대폰 번호일 거야. 개인정보 보호하느라 별표로 가린 건데, 나머지 보이는 부분 보면 아빠 휴대전화 번호지? 거기로 인증 번호 보내기 누르면.. 아빠한테 문자가 올 건데 그걸 컴퓨터로 치ㅁ...
뚝.
전화가 끊겼다.
3분 정도 뒤에 다시 전화가 오더니 근상은 호탕하게 웃으며 '어어~ 이제 됐어 됐어. 아빠가 인증 번호 쳐서 비밀번호 새로 했어.' 외쳤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나는 웃음이 났다. 이메일 비밀번호를 찾는 것을 원격 코치해주는 딸과 난생처음 비밀번호 찾기라는 험한 산을 넘은 60대의 아빠라니, 왠지 귀엽다. 근상의 근상스러움이 빛나는 순간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내가 '잘했네, 비밀번호 어디 따로 종이에 적어두셔!' 말하자마자 근상은 '응~그려~ 알았어~' 하고는 전화를 뚝 끊은 것이다. 이 대화가 채팅이었다면 딱 'ㅇㅇ'의 느낌 정도? 볼일 끝, 대화 끝.
이렇게 지나치게 용건 중심적이고 효율적인 대화에도 상처를 받지 않는 건 나 역시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종종 친구들에게 무심한 년이라고 원성을 받는 인간, 직장 상사에게 인사를 생략하고 본론만 툭 던졌다가 아차 하는 인간, 용건 없이 수다만 떨기 위한 전화통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인간. 재밌는 건 그렇게 전화를 끊은 근상이 2-3분 후쯤 다시 전화를 걸어 잊었던 할 일을 끝마치듯 급하게 나와 남편의 안부를 물었다는 점이다. 마치 지난주에 동료에게 할 말만 딱 써서 이메일로 보냈다가 황급히 다시 메일 쓰기 창을 열고, '앗. 그나저나 잘 지내지? 좋은 하루 보내.'라고 적는 나처럼.
소통하는 행위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려워진다. 나만 이리 요상하게 무심하고도 동시에 예민한가 궁금하다. 말을 많이 하고 온 날에도 내 뜻이 전해졌으리란 보장은 없고, 오히려 집으로 오는 길 후회만 쌓인다. 쓸데없는 말은 방언처럼 터지다가도 다정하고 따뜻하고 중요한 말은 왜 이리 쉽사리 안 나오는지 입술만 자근자근 깨문다. 조금 더 어릴 적엔 가벼운 스몰 톡에는 상당히 능한 편이었는데 그 뻔뻔함마저 밑천이 드러났다. 그래서 나는 어색한 공기를 내가 다 들이마시겠다는 일념으로 말을 쏟아놓기도 하고, 될 대로 돼버리라는 식으로 몇 시간 동안 입을 꾹 닫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나 소통에 서툴다. 그래서 나는 후다닥 다시 전화를 걸어 호들갑스럽게 안부를 묻는 근상을 이해한다. 나 또한 자주 사회적 동물로서 반응할 것인가, 근상의 딸로서 반응할 것인가 고민하는 순간들을 맞닥뜨린다. 아마 계속 반복일 것이다. 무심한 근상의 딸 순정이 먼저 내뱉은 말을 예민한 사회적 동물 순정이 수습하겠지. 오늘은 근상에게 전화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