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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Aug 25. 2021

가을장마

모두 쏟아지는 존재들


  하늘 위 떠다니는 존재를 무턱대고 동경하던 때가 있었다.


유유히 떠 가는 그 가벼움 때문이었는지, 땅 전체를 뒤덮은 그 어떤 것들에도 닿을 염려가 없는 영역이 주는 신비로움 때문이었는지. 그 이유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있는 곳과는 다른 곳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하늘은 충분한 동경의 이유가 되었다.   

  

  하늘을 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헐레벌떡 걷거나 뛰지 않고 유유히 유영하듯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자유의 상징'이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한데 문득 올려다본 하늘 위로 푸르게 펼쳐진 길이 별안간 '하늘 어항'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두둥실 떠가는 구름조차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곳은 하늘길 뿐이라생각하니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눈 비가 구름에게 허락된 유일한 일탈 같이 느껴졌다.


그리 결론짓고 나니 땅이나 하늘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비행기만 타면 동경하던 하늘 위 구름을 들뜬 마음으로 구경하듯이,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도 땅을 동경하며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싶을 때 눈과 비가 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게 또 위로가 되었다.


  툭하면 습관처럼 나와 다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미칠 듯이 부러워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마음이 잠잠해지는 것은. 어쩌면 기상이변처럼 마른하늘에 비를 뿌리다가 감쪽같이 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순환하고 있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모양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물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구름이 커져 무거워지면 비로 내리는 과정'을 두고 자연의 섭리라고 한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동경하면서 갖가지 감정이 솟구치는 것은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한다. 결국 물이든 마음이든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라는 뜻이다. 세상에 움직이는 모든 존재들 순환하며 산다고 생각하니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온종일 누구를 동경하느라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 탈주하듯 요동쳤던 마음이 평안을 찾았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 땅에 존재하는 것이나 하늘에 존재하는 것 모두 부지런히 순환하며 흘러간다. 어떤 날은 한 폭의 그림같이 맑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종일 어둠 속에서 장대비를 뿌리기도 하면서 열심히도 움직인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모양을 보니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것들이 마치 데칼코마니 같았다. 땅과 하늘의 위치는 달라도 하루를 살아내는 모양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했다.


유유히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감상하다가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덕분에 알았다. 모든 동경은 자신이 선 위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다른 곳을 그린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서 있는 삶의 자리를 제외한 세상에 사는 이들을 습관처럼 부러워한다.


내가 갖지 못한 남의 것은 모두 좋고 커 보인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어느 극작가의 말처럼 정작 들여다보면 고민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툭하면 망각하고 스스로를 홀대한다. 왜 고작 이것밖에 이루지 못했는지 한탄하기 바빠 일말의 칭찬에도 인색하다.


  내가 사는 세상 말고는 그 무엇도 살아볼 수 없어서 쉽사리 착각한다. 다른 이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 없어서 그저 나보다 좋을 거라고 마음껏 상상한다. 대개 상상에는 빈틈이 없어서 꽉 차게 그 대상이 부러워진다.


이른 새벽 창밖에 찬 공기에 평소보다 긴장된 고관절을 풀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며칠 새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부러워졌다. 단지 건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동경하다가, 속 시끄러운 생각일랑 접어두고 내 마음도 열심히 순환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늦은 밤 창밖에 부슬부슬 가을장마가 내린다.


 비가 그치면 진정한 가을이 성큼 다가올 거라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을도 장마도 모두 아래로 쏟아지는 것들이다. 그러니 내 마음도 절기 따라 계절에 맞춰 열심히 쏟아내고 있는 중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다 쏟아내고 나면 자연히 새 계절의 옷을 입게 될 거라니.

내게 이보다 더한 보통날의 기적이 또 있을까.


그래서 흔쾌히, 무엇이든 기꺼이 쏟아내기로 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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