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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Sep 05. 2020

오, 해(海)

지우다 : 사랑은 오해로 시작해, 상대를 바로 이해하며 끝난다


진이라도 난 것처럼 마음이 요동쳤다. 너는 어떤 날 예고 없이 불어온 바람처럼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 날,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나에게 너는 그저 하얀 순백색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편안하고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 동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지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순간의 거대한 풍랑처럼 나타나 찰나로 사라진 너의 옛 기억이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침부터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렸다. 갑자기 내린 비가 열흘 간 지속되던 폭염의 흔적을 부지런히 지웠다. 톡톡,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음 한 구석에 미뤄두었던 너를 불러냈다. 이게 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이라고, 날씨 탓을 하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손 잡아도 돼요?



그 날 네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언덕길을 걸으며 물었다. 처마 끝 고드름이 녹아 물방울이 떨어질 만큼 따뜻한 날이었건만, 갑작스러운 네 물음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 나이 스물셋 어느 날, 스무 살을 열흘 앞둔 네가 갑자기 고백해 왔다. 대학에 꼭 합격해서 상경할 테니 두 달만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내가 너를 알게 된 지는 갓 한 달째, 얼굴 보고 만난 것은 딱 세 번째 되는 날 저녁의 일이었다.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너는 작가를 지망하던 나를 만나, 호감을 느끼고 내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을 꽤나 운명처럼 느끼는 듯했다.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는 걸까. 설레는 당혹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온 몸을 던지는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꼭 다 알아야 좋아합니까,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너는 대학 실기시험 때문에 잠시 서울에 머물렀고, 그 일정이 끝나면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야 했다. 행여 대학에 떨어지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패기 넘치던 너의 고백 이후로, 순백색에 가깝다 생각한 네가 내 안에서 점점 짙어졌다. 좋은 데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는 당연한 답에, 쓸데없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던 머릿속 수많은 물음들이 지워졌다.



너와 나의 인연이 다시 이어질 수 있을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인연은 마치 망망대해처럼 느껴졌다. 끝이 정해지지 않아 설레었고 불안했다. 너는 어느 날 난데없이 휘몰아쳐 머릿속을 헤집었다. 밤새도록, 누운 내 가슴 위로 네가 자꾸만 뚜벅뚜벅 걸어 다녀 속절없이 너를 내 마음에 들였다. 운명이다, 덮어두고 오해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리의 인연은 네가 스무 살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공약처럼 던졌던 너의 고백은 현실이 되었고, 목표하던 대학은 아니었지만 D대에 합격했다. 네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제주도로 배낭여행을 간다며 떠난 지 나흘 만의 연락이었다. 대학에 합격했다며 순수하게 웃던 네 웃음소리에, 끝을 알 수 없던 인연이 운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황홀한 오해에 빠졌다.




어디든 혼자 가지 마요,
지금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내 일상으로 들어온 너는 오랜 사막을 거닐다 만난 바다 같았다. 너라는 바다는 생각보다 훨씬 깊어, 발이 자주 땅에 닿지 않았다. 내가 눈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너의 모든 신경은 온통 나에게 향했다. 잠은 잘 잤는지, 밥은 먹었는지, 수업은 잘 듣고 있는지 등 나의 모든 일상에 수많은 물음으로 마음을 두드렸다.





매년 학과에서 가는 부산국제영화제, 나에게는 ‘꿈의 도시’인 곳에서 온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내게도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전까지 그의 출생지는 그저 ‘매년 학교에서 가는 곳’ 혹은 ‘내가 좋아하는 회를 자주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너를 만나, 별 의미 없던 공간은 지워지고 수많은 의미로 변해 있었다. 네가 등 뒤로 감춰 둔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며 웃었던 그 날, 나는 잘 알지 못하는 너라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밤새는 줄도 모르고, 너를 따라 흐르다 흠뻑 젖었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너의 고백이 절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맑은 날은 날이 좋아서 네가 보고팠고, 흐린 날은 너를 위해 일기예보를 확인하다 그리워졌다. 어떤 날은 너의 눈, 코, 곱실거리는 머리카락, 심지어 웃을 때 어느 쪽 입 꼬리가 더 올라가는지 선명하게 그려졌다. 눈길이 닿는 자리마다 떠오르는 너를 마음에 담으며, 자연스레 네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너라는 바다를 헤엄치며, 이해를 배우는 동안 나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갔다. 그 일을 겪기 전까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저 황홀한 떨림이었다.





, 다시 한번 말해봐. 소리 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나를 사랑하다 말하던 너의 눈빛은 더는 반짝이지 않았고, 어느 날, 너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이 먼 곳에 있었다. 수 없이 많은 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 날,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으로 흘렀다.




그 순간만은 진심이었어. 이해해줘.



대체 무슨 의미일지 모르는 그 말이 허공을 맴돌았고, 다시 침묵이었다. 운명과 사랑이라는 말로 나를 흔들던 네 진심이 게 ‘순간’이라는 말을 만나 무참히 부서졌다. 너에게 빠져, 너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너는 내게서 힘없이 저물었다. 이번에는 너를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너라는 바다는 도무지 내게 닿지 않았다. 두 팔 벌려 힘껏 안으면 품 안에 담길 줄 알았건만, 너는 내 손 틈새로 빠져나갔다. 운명이라 덮어두고 믿었던 황홀한 오해도, 수 없는 이해 앞에서 축 늘어진 그림자로 저물었다. 밤새는 줄 모르고 헤엄치던 너라는 바다를 걸어, 뭍으로 나왔다.



그칠 것 같지 않던 같지 않던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빗줄기를 따라 휘몰아치던 내 감정도 소강상태가 되었다. 덕분에 열흘 간 지속되던 폭염의 기세가 꺾였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갑자기 내렸다 그친 덕분이었다. 하루 밤새 서늘해진 공기를 맞으며, 언제 또다시 떠오를지 모르는 너를 지웠다. 어떤 날, 풍랑 같이 찾아온 너와 기억 속에서 다시 이별했다.








오해(오, 海)

/ 담쟁이캘리




어떤 날 내 감은 눈 안으로

네가 불어왔다



하이얀 미소가 아름다워

순백색에 가깝다 생각한 네가

내 안에서 점점 짙어졌다



망망대해처럼 끝을 알 수 없는 네가

난데없이 휘몰아쳐 머릿속을 헤집고



밤새도록, 누운 내 가슴 위로

네가 자꾸만 뚜벅뚜벅 걸어 다녀

속절없이 너를 내 마음에 들였다



운명이다,

덮어두고 오해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너라는 오해에 몸을 던졌다



너라는 바다는

훨씬 더 깊어, 발이 자주 땅에 닿지 않았다

처음 하는 수영에 밤새는 줄 모르고

너를 따라 흐르다 흠뻑 젖었다



두 팔 벌려 힘껏 안으면

품 안에 담길 줄 알았건만, 너는

자꾸 손 틈새로 빠져나갔다



이 해(海)는 끝없이 멀어

몰아치는 풍랑에 자주 뒷걸음질 쳤다



쉼 없이 넘실대는 이 해(海) 앞에서

너에게로 내달리던 두 다리는 헛돌았고

너를 떠라 흐르던 마음은 한 뼘씩 멀어졌다



운명이다,

덮어두고 믿었던 황홀한 오해도

수 없는 이해 앞에서

축 늘어진 그림자로 저물어

뭍으로 나왔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댈 것을 알면서도 무턱대고 뛰어들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물질도 못 하면서 그래도 괜찮다면서 넘실대는 물결에 온 몸을 내던지는 때가 있다. 대개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다. 바다에 빠져도 그곳에 네가 있으니 괜찮고, 설사 다시 뭍으로 나오게 되더라도 다시없을 경험을 했고 그것으로 한 뼘 자랐으니 또 괜찮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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