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사람이었다
입사 3주차,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매일 같은 야근은 고역이었고, 한 번 나기 시작한 입병은 혓바늘에서 아프타성, 헤르페스로 옮겨가며 작은 입 속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았다. 고작 한 달. 한 달만에 나는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삐거덕삐거덕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얼마 전 들어온 적은 월급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이었다. 내가 사준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웃음을 반사해 조금씩 웃을 수 있었고 그들이 방사하는 에너지를 입어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베푸는 것은 나였지만, 힘을 얻는 것도 나였다.
감사한 일은 더 있었다. 어릴 적엔 알 수 없었던 부모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고, 당신들의 사랑을 재고해 볼 수 있었다. 예컨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달달한 빵을 한 보따리씩 사들고 오던 아버지의 특별한 이벤트는, 딸의 철없는 웃음을 통해서라도 일에 보람을 느끼고 싶었던 지친 하루의 반증이었을 것이다. 주말마다 심심해하는 딸을 캠핑장에 데리고 가 고기를 구워주고, 사람 많은 놀이동산에 데려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찻잔을 함께 타주는 것 또한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 사랑이었다. 그때의 부모님이 주 3회 이상 야간 당직을 서던 마흔이 넘은 의사들이었고, 지금 주말마다 시체처럼 방에 널브러져 있는 내가 20대 초반임을 감안해 보았을 때 그런 체력은 쉽게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돈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작고 귀여운 월급을 보고 있자니 한 달간의 고생이 고작 이 정도로 환산된다는 것이 실망스럽기도 하면서, 왜 다들 일확천금을 노리는지, 침까지 튀겨가며 편한 직장을 역설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 나보다 절대 먼저 퇴근하지 않던(못하던) 팀장님이 야근을 하시며 한숨 쉬듯 내뱉던 말을 잊지 못한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그 날을 팀장님 따님의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5시 반에 칼퇴를 하고 딸을 만나러 가겠다던 아버지는 결국 회사에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이미 시간은 9시 반, 팀장님은 모든 것을 체념하셨다.
방송국에는 정규직이 적다. 유입에 비례해 유출이 많으니, 쉽사리 정규직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님처럼 수십 년간 방송국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막 한 달을 지내온 나는 그들이 박봉에 야근이 태반인 이곳에서 어떻게 오랜 기간 일할 수 있는지 그 동기가 궁금했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매력이 있기에 힘든 일을 기꺼이 '해내고 있는 것' 일 수도,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버텨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팀장님의 한탄 섞인 말을 들으며 늦은 밤 야근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던 부모님을 기억했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한 번도 현관에서 반겨주지 않았는데, 앞에서 반겨주면 안 되느냐고 묻던 장난 섞인 질문에 대꾸도 안 했었는데.
이런 깨달음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올 때마다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껏 어른이라는 꼬리표를 벼슬처럼 달고 재밌는 것들, 좋은 것들만 누리고 살았다면 이제야 제 사이즈에 맞는 신발을 신은 느낌이었다. 작은 발로 다양한 신발을 신어보던 때가 지났다는 것이 뿌듯하면서도 씁쓸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삭힐 수 있어야 했고 생각보다 큰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어른이 만능 슈퍼맨처럼 보일 때가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들도 사람이었다.